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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현미 시인 / 거짓말을 타전하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30.

안현미 시인 / 거짓말을 타전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도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 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까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1』(조선일보 연재, 2008)

 

 


 

 

안현미 시인 / 훼미리주스병 포도주

 

 

그때 포도밭에서 돌아와 여름 내내 살뜰히 숙성시킨 포도주를 훼미리주스병에 담아들고 당신이 회사 앞으로 찾아와 곧 먼 여행을 떠날 거라고, 향과 맛이 가장 좋을 때 아끼는 사람들과 나눠마시라는 당부와 함께 건넨 훼미리주스병 포도주

 

그때 당신은 이 별의 여행자 중 가장 향기로운 여행자 마치 제 자신의 그림자를 우주복처럼 착용하고 지구의 거대한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 최초로 지구 밖으로 떠날 결심인 우주인처럼

 

그때 내가 빠뜨린 안녕, 당신 집 천장에 매달린 몸통이 텅 빈 한지 물고기등(燈)처럼 웃기만 하다가 내가 빠뜨린, 포도알 같은 안녕, 그 붉은 우주선 같은 안녕은 지금 어느 우주를 지나가고 있을까

 

 


 

 

안현미 시인 / post- 아현동

 

 

오늘은 아현동 산동네에 갔다

 

오래전 월세 들어 살던 방,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하던 방, 연탄불을 넣던 방, 이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울먹이던 방, 외롭던 방, 고맙던 방, 아주아주 춥던 방,

 

그 시절 내 마음에 전세 들어 살던 첫 애인을 생각하는 밤, 나의 아름다운 남동생의 흐려진 얼굴빛을 걱정하는 밤, 고단한 토끼에게 아무 약효도 없는 안약을 건네던 밤, 가난한 추억과 합체하던 밤,

 

아현동 산동네를 내려와 찾아간 'BAR다' 어둡고 낡은 나무계단 끝에서 화장실이 어딘지 모르고 서 있는 머리 긴 외국 남자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Why?"라고 물으며 괜스레 친절하고 싶던 밤, 함께 여기를 뜨자고 말하면 주저없이 따라가고 싶던 밤, 국적도 모국어도 잃어버리고 싶던 밤, 나 스스로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왜?"라고 자꾸 되묻던 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열정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니? 왜?

 

 


 

 

안현미 시인 / 시간들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해서도 그렇다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입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열일곱 걸음을 더 걸어와 다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태백에 왔습니다 한때 간곡하게 나이기를 바랐던 사랑은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사랑이 죽어서도 나무인 것은 시간들의 일이었습니다

 

 


 

 

안현미 시인 / 와유(臥遊)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안현미(安賢美) 시인

1972년 강원도 태백 출생.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1년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곰곰』 (렌덤 하우스, 2006)와 『이별의 재구성』(창비, 2009),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창비, 2014)가 있음. 2010년 신동엽창작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