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무 시인 / 감나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어보는 것이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3』(조선일보 연재, 2008)
이재무 시인 / 위대한 식사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허청에 함부로 널브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이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 있고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베어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뜨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뿐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
이재무 시인 / 나는 표절 시인이었네
나는 표절 시인이었네 고향을 표절하고 엄니의 슬픔과 아부지의 한숨과 동생의 좌절을 표절했네 바다와 강과 저수지와 갯벌을 표절하고 구름과 눈과 비와 나무와 새와 바람과 별과 달을 표절했네 한 사내의 탕진과 애인의 눈물을 표절하고 기차와 자전거와 여관과 굴뚝과 뒤꼍과 전봇대와 가로등과 골목길과 철길과 햇빛과 그늘과 텃밭과 장터와 중서부 지방의 사투리를 표절했네 이웃과 친구의 생활을 표절했네 그리고 그해 겨울 저녁의 7번 국도와 한여름 강진의 해안선을 표절했네 나는 표절 시인이었네
이재무 시인 / 우리 시대의 더위
우리 시대의 더위는 갈 곳이 없다 백화점에서 쫓겨난 더위가, 식당가 커피숍 사우나 지하상가에서 문전 박대당한 더위가, 은행가 의사당 법원 도청 시청 군청 동사무소 관공서에서 내몰린 더위가, 교회와 성당과 절에서 부정당한 더위가, 버스 전동차 기차 승용차에서 거절당한 더위가, 극장 도서관에서 거부당한 더위가,
학교 학원 회사에서 퇴학 퇴원 퇴출당한 더위가, 꽃집 빵집 어린이집 예식장에서 내쫓긴 더위가 유기견 혹은 좀비가 되어 악에 받친 채 거리로, 골목으로 공원으로 역전 대합실로 광장으로 고시원으로 벌방으로 떼 지어 다니고 있다 언젠가 더위가 미쳐 날뛰는 날이 올 것이다
이재무 시인 / 손
새삼 두 손을 번갈아 바라본다 참 죄가 많은 손이다 여자 손처럼 앙증맞은 이 손으로 나는 얼마나 큰 죄를 저질러 왔던가 불의한 손과 악수를 나누고 치솟는 분노로 병을 깨고 멱살을 잡고, 음흉하게 돈을 세고 거래를 위해 술잔을 잡고 쾌락을 위해 성기를 잡고, 잡아왔던가 왼손이 한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오른손이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다본다 펼친 손에는 내가 걸어온 크고 작은 길들이 지울 수 없는 금으로 새겨져 있다 손을 잘라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손 없이 밥을 먹고 손 없이 책을 읽고 손 없이 사람을 만나 뜨겁게 포옹하며 사는 날이 오리라
이재무 시인 / 빈집
빈집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출항 후의 항구처럼 쓸쓸한 빈집엔 자기 생각에 빠져 사는 식구들이 바깥에서 묻혀온 제각각의 먼지들 이리저리 낮게 출렁이다 바닥에 내려앉는다 문밖 소음이나 가끔 틈을 기웃거리고 창 너머 흐린 구름이나 더러 힐끗거리는 외양간 같은 빈집엔 살찐 고요 한 마리 들어앉아 아가리를 벌린 채 자꾸만 돋아나는 시간의 푸성귀 뜯어 저작하고 있다
이재무 시인 / 흑산도 홍어
목포에 가면 흑산도산 홍어를 먹을 수 있지 묵은 김장 김치 한 장 넓게 펴서 푹 삶은 돼지고기에다가 거름에 삭힌 홍어 한 점 얹혀 한입 크게 삼켜 소가 여물을 먹듯 우적우적 씹다보면 생활에 막힌 코가 뻥, 뚫리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다네 빈 속 싸하게 저릿저릿 적셔가며 주거니 받거니 탁배기 한 순배 돌리다 보면 절로 입에서 남도창 한 자락 흘러나와 앉은 자리 흫을 더욱 돋기도 하지만 까닭 없이 목은 꽉 메면서 매캐한 설움 굴뚝 빠져나온 연기처럼 폴폴 새어나와 콧잔등 얼큰, 시큰하게도 하지 사투리가 구성진 늙은 여자 허리를 끼고 소갈머리 없는 기둥서방으로 퍼질러 앉아 잠시 잠깐 그렇게 세월을 잊고 농익은 관능 삼키다보면 시뻘겧게 독 오른 생의 모가지쯤이야 한숨 죽여 삭힐 수 있지
이재무 시인 / 물자국
물자국은 물에 자국이 생겼다는 말 물에 상처, 물에 흉터가 생겨났다는 말 배 지나간 자리에 남는 자국이나 상처나 흉터를 재빠르게 꼬매고 지우는 물결 물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은 무수한 물의 상처, 물의 흉터 때문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를 물의 고통, 물의 신음으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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