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시인 / 술 얘기
제 버릇 개 주랴만 술이 좋아 좋구도 남지 좋아서 마신다 술은 그냥 술이로되 술 속에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술은 그냥 술이 아니다 술은 액체로 된 꿈 떠올리고 싶을 때 떠올려지는 잃어버린 것들 사라져버린 것들 그런 것들 흐르고 흘러서 모여진 강의 하류와도 같은 것
흰 돛을 단 작은 배가 술잔 속에 어우러지면 여자들이 어머 너 예뻐졌다 하는 말처럼 지나가는 말로 흘려버리듯 자네 취했구먼 그럴 수 있어서 좋다
김영승 시인 / 비밀
한 사람이 먹고 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보고 있다. 먹고 있는 사람이 보고 싶거나 보고 있는 사람이 먹고 싶거나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저 먹고 있고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거기엔 숨막히는 비밀이 있는 것 같다. 나를 보고 웃고 있는 당신의 얼굴엔
김영승 시인 / 보지
처음 읽었을 땐 무덤덤했는데, 오늘 오수에 들려고 침대에 누웠다 집어든 순간 글자가 눈알에 척척 처박히면서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綴)하는 집중감 속에서 삼두마차를 이끌고 달려오는 그 폭력적인 소요가 일면서 웃겨 죽는 줄 알았다.
김영승 시인 / 북어
옛날 아주 먼 옛날 유동 살 때 7 , 8년 전/ 결혼 초기
출산하고 난 후였을까? 남들은 그게 뭐 그렇게 오랜 옛날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옛날 아주 먼 옛날 아득한 술 취해서 자고 있을 때 부엌에서 퍽, 퍽, 퍽, 퍽, 퍽, 퍽, 퍽, 퍽, 퍽, 퍽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뭐 씹는 게 먹고 싶어서요...“ 다락에 두었던 먼지 쌓인 어머니가 갖다주신 북어를 방망이로 두들겨 뜯어먹고 있었다 이제 아내는 나와 함께 늙어 몸도 아프고 _ “그럼 오징어라도 사다 먹지...” 말이 없었다 “돈이 없어요...”
그 유동집 열 평 남짓한 무허가 2층 건물의 아래층을 빌려 살 때 방보다 낮은 부엌 그 연탄보일러 옆 쌓인 연탄이 아주 환했다 흑인들 같이 아내를 윤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김영승 시인 / 나쁜 놈의 사랑
나는 참 나쁜 놈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나는 사는 것을 싫어하는 나쁜 놈입니다.
나는 참 나쁜 놈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당신은 사는 것을 싫어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람.
밥을 먹고 연탄재를 갖다 버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겠습니다.
김영승 시인 / 이것도 나의 일
개미는 시멘트 둑 빠르게 이동 한 뼘 높이 벽 개미도 놀러간 적 있을까 시멘트 枕木 같은 화단 臺 얘들이 타고 오르지 않으면 누가 타고 오르리오? 소금쟁이가? 록 클라이머가?
그러다가는? 그러다가는 죽는거지 오르게 해주세요! 오르게 해주세요! 발밑이 地獄이라 다들 그러리 발밑이 極樂이라 할지라도
김영승 시인 / 취객의 꿈
댁은 뉘시오? 그저 일개 초개와 같은 과객이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치기가 또 아쉬워 예서제서 숨을 찾는 뿌려진 꽃잎 같은 취객이올시다. 내 앞에서 흐르는 이제는 슬픈 한 여인을 바라보며 바닷가에 앉아 모래처럼 부서진 내 영혼을 세며 기나긴 세월 쉽게쉽게 보내지요.
하얀 조가비 그걸 집어 내 몸 어디부터 가릴까요? 하얀 조가비 그 예쁜 잔에 맑은 술을 따라 출렁이는 바닷물 같은 이 식은 대지를 마셔 버리고 그리고 스스로 설 땅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래서 댁은 무얼 하십니까? 남들처럼 외롭고 마셔 버리고 싶어도 마실 수 없는 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득한 생각에 잠겨 있지요. 내 손이 닿아보지 않은 그리고 노형의 손도 닿아보지 않은 저 하늘을 처녀막처럼 찢고 그리고 피를 흘리겠습니다. 하늘의 푸른 빛 그건 바로 내 핏줄 속을 흐르는 내 피의 빛이고 싶습니다.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신사처럼 내 머리에 쓰고 다녔던 저 하늘을 벗고 그리고 정중히 죽어야지요. 죽음은 이 무례한 놈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인사입니다.
김영승 시인 / 흐린 날 미사일
나는 이제 느릿느릿 걷고 힘이 세다
비 온 뒤 부드러운 폐곡선 보도블럭에 떨어진 등꽃이 나를 올려다보게 한다 나는 등나무 페르골라 아래 벤치에 앉아 있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등꽃이 상하로 발을 쳤고 그 휘장에 가리워 나는 비로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미사일 날아갔던 봉재산엔 보리밭은 없어졌고 애기똥풀 군락지를 지나 롤로스케이트장 공원 계단 및 노인들 아지트는 멀리서 보면 경회루 같은데 내가 그 앞에 있다
명자꽃과 등꽃과 가로등 쌍 수은등은 그 향기를 바닥에 깐다
등꽃은 바닥에서부터 지붕까지 수직으로 이어져 꼿꼿한 것이다
허공의 등나무 덩굴이 반달을 휘감는다 급한 일? 그런 게 어딨냐
김영승 시인 / 권태 7
다른 지방에선 어쨌는지 모르지만, 어릴 적 내 살던 곳 인천에선, 구슬치기나 딱지치기 또는 <홀짝>이나 <으찌두비쌈>하다가 홀랑 다 잃으면 <뽕까>했다고 했는데, 나는<뽕까>했다. 젊음도 삶도 사랑도 女子도 詩도 따먹기를 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뽕까>한 셈이다. 그래서 나는 현재 <젊음>과 <삶>과 <사랑>과 <女子>와 <詩>의 빚더미에 앉아 있다. 앞으로 더 <뽕까>할 건 내 목숨밖에 없으니까, <개평>으로 꼭 필요한 것만 하나씩 얻어 다시 시작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에 대한 박애주의자인 내가 특별히 한 여자를 편애하여 아니 더불어 善終하기를 作心하여 삼일 만에 전국에 禁婚令을 내리고, 皇帝의 第四妃 女莫母보다도 더 아득한, 非常한 醜婦, 醜婦 중의 醜婦, 醜婦의 대표를 妃 또는 ?로 揀擇하여 <聖婚>[Hierogamie]을 하니, 그것으로, <夢遊桃源圖>를 그리던, 꽃밭에서 놀던, harem의 <소지> 노릇 하던, 내 인생, 땡 ? 하고, 飄然히 종치다. 꼿꼿이 세우고, `게`의 眼柄처럼 부글부글 `게`처럼 거품을 물며 구멍에 들락날락 手淫을 하던. 슬슬슬슬슬슬…… 매맞아 버릇한 숫, 똥개처럼, 나는 아내, 그 和尙의 눈치를 살핀다. 아내는 무섭다. 아내는 擧案, 諸未, 十이다.
김영승 시인 / 권태 18
남이 조터지는데 잠들어 있지 말자. 내가 조터지고 있는데 아내는 잠들어 있다. 좆, 터질 맛도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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