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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대철 시인 / 저 물빛 아이 외 10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

신대철 시인 / 저 물빛 아이

 

 

한여름, 개울 건너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왕매미 울음 그치자 따가운 햇볕 속에 서늘한 그늘이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었었는지도 모르지요, 굽은 팔감춘 한 아낙이 검은 치마를 길게 늘어뜨리고 땅만 보고 황급히 스쳐갔습니다, 스쳐가다 얼핏 돌아서서 '혹시', 하고 말을 꺼내려다 서로 그냥 지나쳐갔습니다, 징검다리 몇 개 밟고 개울 지나 다락논 논배미 지나 꾀꼬리봉 슬쩍 보고 아낙 하나 스쳤는데 지나온 길이 까마득했습니다, 그때 좌우 방향 감각만 살아 있었던가요, 텅 빈 마을이 아낙 하나로 가득 차, 아니 검은 치마가 길게 휘장을 쳐 길을 잃었던가요,  

잠시 서서 마을을 둘러보았습니다, 마당 앞에까지 산이 내려온 나지막한 골집 방문이 열려 있었고 그 안 어둑한 곳에 한 아이가 책장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창호지에 배어든 햇빛이 아이의 얼굴에 문살 무늬를 씌우고 있었습니다, 인기척을 내고 기다려보았으나 그 아이는 고개 숙인 채 책장만 넘겼습니다, '너 순자지, 금방 나가신 분 네 엄마시니?' 가까이 다가가며 물으니 그 아이는 보지도 않고 어둡게 '네'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그해 여름 내내 그 아이를 만났고 가르쳤고 무수히 질문을 했지만 그 아이는 어둡게, 간혹 해맑게 '네'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마을 한가운데 살아도 마을과 떨어져 살아와서 그럴까요, 생의 골이 너무 깊어서 골을 빠져나오는 동안 그 많은 말들이 줄줄이 다 끝나버리고 내겐 다만 '네' 소리만 들렸던 걸까요,

칠갑산에서 가장 깊은 골은 음달뜸이었습니다, 순자때문이지요, 누구든 그 아이와 눈을 마추치면 그 어두운 눈 속으로 한없이 끌려들어가 나오는 길 찾지 못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어둑해졌다 갑자기 해맑아지는 목소리 한 줄기에 매달려 나오게 되지요, 그 아이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음달뜸으로 들었갔다 양달뜸으로 나와 다른 땅에 이르게 됩니다,

천창호수 안고 구를*돌아  

개울 한 번 건너서  

마음 짙푸르러지며 깊어지는 곳,  

저길 보세요, 그대 앞에 저 물, 저 빛, 저 깊은 물 빛 아이,  

 

*칠갑산에 있는 마을 이름. 원명은 구을(九乙)

 

 


 

 

신대철 시인 / 오래 기다리면 오래 기다릴 수록

 

 

바람이 가진 힘은 모두 풀어내어   

개울물 속에서 물방울이 되게 바람을 적시는 비   

비 같은 사람을 만나려고 늦가을의 미루나무 보다도   

훤칠하게 서 있어본 사람은 보이겠다. 오늘 중으로 뛰어 가야할 길을 바라보며 초조히 구름 속을 서성거리는 빗줄기, 빗줄기

 

 


 

 

신대철 시인 / 또 만납시다, 지구 위에서

 

 

춥지?

우리의 한 끝은 비탈, 새가 나는군. 지상에 집 하나 짓고 서향창 빛 한 줄기로 날아가버린 새, 불러볼까, 저 새? 더 추워질 거야.

우리는 어느새 동지를 지나고 있었다. 어딜 가나 집, 집, 사람들은 또다시 자기 바깥으로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집을 버려야지, 잠이 와, 집을 가지면 꿈을 꾸게 되고, 꿈속엔 숨을 데가 너무 많아, 갇히게 돼. 그들이 거쳐간 길은 모두 영하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뿌옇게 눈가루가 날렸다. 우리는 눈썹에 눈가루를 쓴 채 그들 반대쪽으로 걸어내려갔다. 흰 눈꽃을 피워 조용히 길을 밝히는 나무, 눈나무들, 다가서면 스르르 녹아 내렸다. 주춤 거리기만 해도 구두 바닥이 달라붙고 눈앞에는 얇은 성에가 꼈다. 우리도 눈꽃 한 송이 피우다 갈까? 잠시 망설이는 동안 그들은 우리를, 그들이 한때 살아 움직인 자기 자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그들은 우리의 미래인이고?   

혼자서는 아무도 미래를 만들 수 없으니까.   

무섭군, 우리도 언젠가는 누구의 미래, 누구의 미래인이 된다니.   

우리는 갈수록 서로들 찬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 이제 끝이군. 우리도 슬슬 날아오를까?   

따스한 곳으로?   

또 만납시다. 지구 위에서   

자기 자신 혹은 스스로 미래인이 되어.

 

 


 

 

신대철 시인 / 잎, 잎

 

 

낮은 산(山)도 깊어진다.

비안개에 젖어 무수히 피어나는 속잎,   

연하디연한 저 빛깔 사이에 섞이려면

인간의 말의 인간을 버리고   

지난 겨울 인간의 무엇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했을까?   

핏줄에 붙은 살이 더러워 보인다, 잎과 잎 사이   

벌거벗고 덜렁거릴 것 덜렁거리며 서 있을수록……   

잎, 잎, 무성하거라 무성하거라 무성하거라   

한여름 산(山) 속에 미리 들어와 마음을 놓는다.   

 

<무인도를 위하여, 문학과지성사, 1977>

 

 


 

 

신대철 시인 / 4월이여, 우리는 무엇인가

 

 

1

강물이 서서 가지를 친다.   

폭풍을 휘몰아낸 가지 끝엔   

하얗게 피어나는 새들,   

그의 몸 전체가 손으로 뻗어나간다.   

사방이 닫힌 골목을 지나 칼날 총구멍 속을 지나   

가지에 피 맺힌 둥지 하나 열리고 있다.   

(땅은 길에 버려 있다. 길바닥에는 이끼 낀 돌 부스러기 몇 개, 우물 속에는 깨진 지붕이 가라앉아 있다. 스물 서넛에 처음으로 동네의 지붕에 올라 동네의 끝을 본 자는 죽고 죽어서 4월 하루를 남기고 그 아이들은 자라서 휘어지며 논밭 없는 평야를 괴고 있는가?)

 

2   

4월이여   

새도 둥지도 허공에 묻히고   

오늘은 네 앞에   

누가 설 수 있는가?   

누가 네 이름을 부를 수 있는가?   

네 피로 걷고 시를 쓰고   

네 피로 숨쉬고 일하고 있지만   

4월이여   

우리는 너의 무엇인가?   

온갖 거리엔 개나리 같은 진나리   

진달래 같은 개달래 우글우글 피고 있을 뿐   

 

 


 

 

신대철 시인 / 초원

 

 

산동네 빈 집에   

벌통 버려두고   

벌떼 찾아간 그대,   

벌은 감나무꽃에 몰려드는데   

그대는 어디로 몰려가고 있는가.   

그댈 찾아 해와 달과 별과 바람을 지났다. 산동네 얼굴에 번지던 풀빛 얼룩진 물살들 습지와 맨땅을 비비다가 마른 물이끼에 스민다. 이정표 지워진 팻말에 앉아 먼 산 바라보는 물레새, 꼬리를 좌우로 흔들 때마다 구름 낀 햇살들 먼 산 능선과 엉켜 들어 침엽수림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한 덩이로 뭉쳐 나온다.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 가는 잎 사이로 벌침을 놓는다.

그대도 풀꽃도 없지만   

윙윙거리는 소리   

초원을 통채로 울린다.   

 

 


 

 

신대철 시인 /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면   

소승폭포, 바람불이, 물돌이동   

한 곳으로 나란히 붙여   

그곳에 숨구멍 내고   

물방울로 숨쉬리   

그냥 스쳐가는 이   

얼굴 마주쳐 보고   

아무 길이나 물으면서   

아무 길이나 함께 서 있으리   

눈에 가슴에 묻힌 이야기 들추어   

하, 참, 세상에, 그렇지요   

맞장구치는 소리 울려 들으리   

햇빛은 햇빛대로 쓸리고   

겹그림자 나누어질 때   

그곳에 온 가을을 멀리 돌아   

내게로 돌아오리, 있지도 않은 내게로   

 

 


 

 

신대철 시인 / 처형1

 

 

1   

홀로 가는 해   

사람을 산속에 남겨둔 채   

홀로 가는 물, 달, 안개   

어머니, 제 집은?   

저는 혼자서도 모여 있지 못합니다. 제가 어머니 집이라면 어머니, 아주 집을 뜨신 어머니, 저는 산 속에 갖혀 殺氣 감추는 법이나 익히며 될수록 될수록 사람을 피하고 산짐승들이나 길들일까요? 아니, 덫이 될까요? 저를, 어머닐 잡는 덫.

새를 잡았습니다, 날려주고   

새를 잡았습니다, 날려주고

 

2   

물소리는 뚝 끊어졌다 내 실핏줄과 이어지고, 찬바람, 불빛에 묻어나온 낮은 목소리들에 이끌려 다시 산을 넘었다. 친구여, 내 괴롭지 않을 때 찾아와야 하느냐? 뻑뻑해지는 눈, 엊그제는 하루 끝 침묵 끝까지 흘렀다.바닷가를 끼고 흘러도 이제 산에 둘러싸인다. 나를 몇 번 넘겨야 스스로 산속에 들 수 있을까? 네가 잠든 집은 집 전체가 대문, 집 전체가 불빛, 모든 사람들의 잠 속으로 흘러들고 싶다.   

완성해다오, 한 남자를   

식물이 생길 때의 첫소리를 닮은 얼굴이게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날 가두고 오래 내 괴로움을 받지 않는 산이여.   

 

 


 

 

신대철 시인 / 반딧불 하나 내려보낼까요?

 

 

상처 깊숙이 노을을 받는 그대, 훌쩍 바람이나 쐬러 올라오시죠. 때 없이 가물거나 가물가물 사람이 죽어가도 세상은 땅에서 자기들 눈높이까지, 한걸음 윗세상은 빈터 천집니다. 여기서는 누구나 무정부주의잡니다. 여기서 미리 집 없이 사는 자가 되어보고, 저 아래 이글거리는 땅 사람 그대를 둘러보고 여름이 다 끝날 때 내려가시죠.

풀벌레가 울기 시작합니다. 다시 길을 낼까요? 초저녁 한적한 물가나 무덤가로 나오시면 푸른 반딧불 하나내려보내겠습니다.

 

* 신대철 시집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문학과지성사)중

 

 


 

 

신대철 시인 / 빗방울화석

 

 

흘러간 발걸음들   

흘러간 구름 아래   

퇴적층을 이루는 곳   

흙내 향기로운 지평선을   

두더지는 땅껍질 들쑤셔 넘어가고   

해와 달 마주볼 때   

줄 걸어 넘어가는 땅거미   

열풍 속에 사막을 넘어   

물 한 모금 얻으려고   

사람 사이로 들어온 이는   

길 엉킨 거리에서 쓰러진다.   

그 불덩이 몸 두드리며   

하얗게 날아가는 빗방을, 빗방울   

 

<동서문학> 2001, 가을호.

 

 


 

 

신대철 시인 /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죽은 사람이 살다 간 南向을 묻기 위해 사람들은 앞산에 모여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소년들은 잎 피는 소리에 취해 산 아래로 천 개의 시냇물을 띄웁니다. 아롱아롱 산울림에 실리어 떠가는 물빛,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저 아래 저 아래 개나리꽃을 피우며 활짝 핀 누가 사는지?  

조금씩 햇빛은 물살에 깎이어갑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리도 깎이어 물 밑바닥에 밀리는 흰 모래알로 부서집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흰 모래 사이 피라미는 거슬러오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그대를 위해 사람들은 앞산 양지 쪽에 모여 있습니다.

 

- 시집『무인도를 위하여』

 

 


 

신대철 시인

1945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同 대학원 졸업. 196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降雪의 아침에서 解氷의 저녁까지〉가 당선되어 시단에 데뷔. 시집으로 『무인도를 위하여』『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자이칼 키스』가 있다. 제1회 박두진문학상 수상. 제4회 백석문학상 수상. 현재 국민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