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시인 / 인파이터 -코끼리군의 엽서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병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템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기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5』(조선일보 연재, 2008)
이장욱 시인 / 변절자의 밤
아침에 새로운 마음으로 깨어났는데 그것이 밤이었어요 그것도 아주 옛날 밤
옛날 밤 짧다. 너무 짧아서 잠들 수 없다. 마치 마치…… 하면서 조금씩 다가오는 이야기 설마 설마…… 하면서 점점 무서워지는 이야기 병든 노인들만이 알고 있는 마음으로
엄습하는 것이 있더군요 마침내 당신을 잊고 당신의 먼 곳에서 새롭게 깨어났는데 다시 옛날 밤
밀레니엄이 추억이고 4.19가 전생이고 꿈속의 해방을 거쳐 식민지의 새벽 두 시까지
나는 잤다. 옛날 밤에 잤다.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술이 깨고 술을 마시고 술이 깨고 관 뚜껑을 열고 일어나 아침을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백조와 창조와 폐허를 창간했다. 카프와 신간회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을 했다. 이봐요, 경성에서는 무서운 살인사건이……
당신과 함께 적진에 침투했는데 내가 변절자였어. 나는 왜 자꾸 적의 마음을 이해하는가. 나는 왜 나도 모르게 지혜로워지는가.
옛날 밤 짧다. 너무 짧아서 잠들 수 없다. 나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칼을 빼어 들었다. 이제 그만 그만…… 하면서 다가오는 결정의 시간에 모든 것이 바로 지금인 이야기
새벽 두 시에 깨어났는데 마침내 새로운 마음이었어요 그것은 당신에게 한 번도 얘기해보지 못한 무서운 감정
이장욱 시인 / 엉뚱해
갑자기 흥겨워지는 사람이 있고 갑자기 지쳐버린 사람이 있고 내일이 오자 문득 내 인생에서 사라지는 사람이 있고
아침에는 私心이 없어졌다 긍정의 힘으로 나아갔다 중력은 고마워, 그게 없으면 십 년 전은 어디로 갈까 어제는 또 어디로
나는 펭귄처럼 무심해졌다 뒷골목을 헤매도 삐라가 없고 인공위성의 고도를 상상할 수 없고 북극의 밤은 길어
우리는 엉뚱하게 年金을 부었다 갑자기 미래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믿어요
저 앞에서 뒤뚱거리며 펭귄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엉뚱해 역시 펭귄이란
이장욱 시인 / 왼손의 돌멩이
갖고 싶은 게 있나? 골라 보렴. 오른쪽 주먹과 왼쪽 주먹 중에서 이 상자와 저 상자 가운데서
오른쪽 주먹을 펴면 꽃들이 피어오른다. 일생을 화사하게 덮어 버리지. 하지만 왼손에는 차가운 돌멩이 외로움조차 사라진 마음
빗소리. 수많은 각자의 시간들이 떨어지는 빗소리.
나는 검고 커다란 망토를 휙! 펼쳐서 너를 가리네. 너를 덮어버리네. 밤의 망토 속에서 너는 문득 생명을 얻고 점점 더 생생해지고 마침내 생활을
나는 경쾌한 리듬에 맞춰 무대 앞으로 전 세계의 관람객들이 보는 앞에서 탭댄스를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우아한 포즈로 만주 벌판의 역사를 바꾸고 십 년 전의 빗소리를 바꾸고 어젯밤 굳게 먹었던 마음을 바꾸었네.
아아, 하지만 모든 것은 망토 속에 있었다. 빨간 구두가 혼자 춤을 추는 아홉 살 먼 나라의 수평선을 표류하는 열아홉 살 스물아홉에서 쉰아홉의 변치 않는 사랑까지 오늘은 마법에 가까운 아흔둘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망토를 휙! 걷어내자.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허공 누구든 처음부터 알고 있던 바로 그것 하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처럼 비명을 지르자. 네가 사라졌다!!!
여러분, 이것은 마술이 아니다. 망토 속에는 허공이 아니라 빗소리 수많은 각자의 시간들이 떨어지는 빗소리
그리고 나의 아름다운 왼손의 돌멩이
이장욱 시인 / 내 인생의 책
그것은 내 인생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어디서 구입했는지 누가 선물했는지 꿈속의 우체통에서 꺼냈는지
나는 내일의 내가 이미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갔다. 일을 했다. 드디어 외로워져서
밤마다 색인을 했다. 모든 명사들을 동사들을 부사들을 차례로 건너가서 늙어버린 당신을 만나고 오래되고 난해한 문장에 대해 긴 이야기를
우리가 이것들을 해독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영 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 너무 많은 글자가 허공에 겹쳐 있기 때문
당신이 뜻하는 바가 무한히 늘어나는 것을 지옥이라고 불렀다. 수만 명이 겹쳐 써서 새까만 표지 같은 것을 당신이라고 당신의 표정 당신의 농담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이상한 꿈을 지나서
페이지를 열 때마다 닫히는 것이 있었다. 어떤 문장에서도 꺼내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당신은 토씨 하나 덧붙일 수 없도록 완성되었지만 눈 내리는 밤이란 목차가 없고 제목이 없고 결론은 사라진 나는 혼자 서가에 꽂혀 있었다. 누가 골목에 내놓았는지 꿈속의 우체통에 버렸는지 눈송이 하나가 내리다가 멈춘 딱 한 문장에서
이장욱 시인 / 밤의 독서
나는 깊은 밤에 여러 번 깨어났다. 내가 무엇을 읽은 것 같아서. 나는 저 빈 의자를 읽은 것이 틀림없다. 밤하늘을 읽은 것이 틀림없다. 어긋나는 눈송이들을, 캄캄한 텔레비전을, 먼 데서 잠든 네 꿈을 다 읽어버린 것이
의자의 모양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눈발의 격렬한 방향을 끝까지 읽어갔다. 난해하고 아름다운, 텔레비전을 틀자 개그맨들이 와와 웃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잠깐 웃었는데,
무엇이 먼저 나를 슬퍼한 것이 틀림없다. 저 과묵한 의자가, 정지한 눈송이들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내 쪽을 바라보는 개그맨들이
틀림없다. 나를 다 읽은 뒤에 탁, 덮어버린 것이. 오늘 하루에는 유령처럼 접힌 부분이 있다. 끝까지 읽히지 않은 문장들의 세계에서
나는 여러 번 깨어났다. 한 권의 책도 없는 텅 빈 도서관이 되어서. 별자리가 사라진 밤하늘의 영혼으로.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읽은 것은 무엇인가?
밤의 접힌 부분을 펴자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문장들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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