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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영승 시인 / 이방인(異邦人)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30.

김영승 시인 / 이방인(異邦人)

 

 

버스비 900원

버스 타서 죄송하다고

백배사죄(百拜謝罪)하며 내는 돈

 

화장실 100원

오줌 눠서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아들 고등학교 신입생 등록금 사십오만 구천오백팔십 원

학교 다녀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상갓집 부조금 3만원

살아 있어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공중전화 100원

말 전해서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돼지고기 한 근(斤) 8,000원

처먹어서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서러움이 있기 때문에우리는 죽을 수 있는 것이다

한(恨)이 있기 때문에

 

함소입지(含笑入地)할 수

있는 것이다

 

 


 

 

김영승 시인 / 아방가르드

 

 

아무도 없는 곳

그게 유토피아고

아방가르드다

 

오늘은 청명(淸明)이고 내일은 한식(寒食)

 

공주횟집 진열장엔 산낙지 15,000원이라고

써 있다

 

나는 나의 심야(深夜)산책을 재개(再開)하고

 

걷고 또 걸어서

연수성당 뒷길

 

여성회관 옆 조일사 건물을 훤히

쓰윽 한 번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그 2층 짜리 낡은 건물 옥상엔

 

역시 아무도 없다

 

불량(不良) 청소년들도

 

오지 않는

적막강산(寂寞江山)

― 그렇다고 산낙지가 어떻게 한 접시에 15,000원이냐?

 

낙지 한 마리 없는 옥상(屋上)은/ 칠흑의 심해(深海)

 

멀리 아파트가 인공어초(人工魚礁) 같고

여자(女子)들은 다 아전인수(我田引水)

발버둥을 치고 있다

 

 


 

 

김영승 시인 / 아는 놈

 

 

아는 놈야?

모르는 놈인데?

 

턱끝으로 가리키며 그들은 그렇게 주고받고 있었다

부평역 플랫폼엔 비가 내리는데

 

겨울인데

화장실에서 나오며

 

그들은

나는 그들한테도

모르는 놈이다

 

 


 

 

김영승 시인 / 21평의 유목민

 

 

내가 사는 아파트는 21평

 

아내는 안방에

아들은 작은방에

그리고 나는 거실에 잔다

 

길에서 주워온

직사각형 파란 플라스틱 화분에

번식한 蘭을 세 개 심어놓으니

 

나는 그 푸른 싹 들여다보는 것이 꼭

유목민 같다

 

풀을 찾아 물을 찾아 떠도는

유목민

"酩農業을 하십니까?"

 

옛날 가슴(乳房)이 큰 한 여인한테

그렇게 물은 것이 생각나

羊이건 염소와 야크 등등

順한 짐승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牧者인가?

 

 


 

 

김영승 시인 / 고독

 

 

그것이 자초(自招)한 고독이건

불우(不遇)의 고독이건

일생(一生) 고독했다는 것은 참

장(壯)한 일이다

 

더욱 고독해야 하는데

이 비오는 날

주전자 물이 끓는다.

 

무궁화, 살구나무, 대추나무 비에 젖고

모과나무는 폭포다

 

오전인데도 어두운 하늘

천둥과 번개는

눈물이며

초범자(初犯者) 사진 찍기다

 

폭우는

늘 하늘 아래

땅 위

고매한 정신°처럼

추상같이 떨어진다

 

 


 

 

김영승 시인 / 봄, 희망

 

 

일곱달 째 신문대가 밀려

신문도 끊겼다

저녁이면 친구인 양 받아보던 신문도

이제 오질 않는다

며칠 있으면 수도두 전기도 끊길 것이다

며칠 있으면

이 생명도 이 몸에서 흘리던 핏줄기도

끊길 것이다

 

은행의 독촉장과 법원의 최고장

최후통첩장

수많은 통고장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아내가 보낸 절교장도

그 위에 놓여있다

 

진달래가 피었노라고

아내에게 쓰던 편지 위에

핏방울이 떨어진다

가장 빛나는 것을

나는 한 장 집어

들었다

 

 


 

 

김영승 시인 / 죽을 때까지

 

 

나는 이미

도립(倒立)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발길로 뚝뚝 치면

옆으로도 그러고

있다

 

아직

추워서 그런

것이다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 기다리겠다 공부하겠다

하지말고

그것도 좋지만

죽을 때까지 일단 죽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밖에 생각은 다

잡념인데

 

생각은 잘 때나 하는 것

무슨 심사숙고며

天思 만려인가

 

생각은 잘 때나

죽을 때

잠깐 하면 된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나

다들 뭔가를

궁리(窮理)하는 거겠지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死刑직전도

다 그런 표정과 자세며

性交中에도 그렇다.

 

 


 

 

김영승 시인 / 밤의 향기

 

 

이 향기

이 비 쏟아지기 전날 밤의

이 향기

이 향기는

나는 죽어 귀신이 된다면

잠깐 이런 향기리라

롤러스케이트장 공원

자판기 불빛에다 대고 이 글을 쓴다

오늘밤엔

아무도 없어

좋다

어둠 속엔 토끼풀

그 위엔 아카시아로군

멀리

붉은 네온 십자가

대명 뼈다귀 감자탕 네온 간판

“이름이 뭐냐?”

포로처럼 나는 물었다

“김영승”

나는 대답했다.

 

 


 

 

김영승 시인 / 서울신탁은행귀신

 

 

귀신이 있다 별의별 귀신이

다 있지만 나는 이제 서울신탁은행귀신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개설한

온라인 계좌 만 원도 오고 삼만 원도 오고

오만 원도 오는 원고료를 갖고 도장 갖고

찾아가는 곳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서울신탁은행 지점을 보면 우리 은행야

 

나는 중얼거리네 우리

은행야 아내에게도 말한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가난한 것은

당연한 일 우리 은행야.

 

 


 

김영승(金榮承) 시인

1959년 인천에서 출생.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졸업. 1986년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반성·시〉 외 3편의 시 를  발표하며  詩作  활동  시작. 시집으로 『차에 실려가는 차』,  『취객의 꿈』,  『아름다운 폐인』 ,  『몸 하나의 사랑』,『권태』,『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 『화창』, 『흐린 날 미사일』이 있음. 2002년 제3회 현대시작품상 수상. 2010년 제5회 불교문예작품상 수상. 2011년 제29회 인천시문화상 수상. 제13회 지훈문학상 수상. 2014년 제1회 형평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