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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영승 시인 / 반성 704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9.

김영승 시인 / 반성 704

 

 

밍키가 아프다

네 마리 새끼가 하도 젖을 파먹어서 그런지

눈엔 눈물이 흐르고

까만 코가 푸석푸석 하얗게 말라붙어 있다

닭집에 가서 닭 내장을 얻어다

끓여도 주어보고

생선가게 아줌마한테 생선 대가리를 얻어다 끓여 줘 봐도

며칠째 잘 안 먹는다

부엌 바닥을 기어다니며

여기저기 똥을 싸 놓은 강아지들을 보면

낑낑깅 밍키를 보며 칭얼대는

네 마리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나는 꼭 밍키의 남편 같다.

 

 <1987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3』(조선일보 연재, 2008)

 

 


 

 

김영승 시인 / 화창

 

 

폭우 쏟아진 뒤

이 화창,

 

그게 죽음이리라

 

나의 죽음이리라.

 

고추잠자리는

 

疊疊(첩첩) 열두 폭 치마 찢어질 듯 짓푸른

얼음 같은 깊은 하늘과 1:1로 同等(동등)하고

자체로 沈默(침묵)이다

 

―赤卒(적졸·고추잠자리의 별칭)아, 너 산타클로스냐?

나한테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구나

 

神(신)의 음성이다.

 

 


 

 

김영승 시인 / 아름다운 폐인

 

 

나는 폐인입니다

세상이 아직 좋아서

나 같은 놈을 살게 내버려 둡니다

착하디 착한 나는

오히려 너무나 뛰어나기에 못 미치는 나를

그 놀랍도록 아름다운 나를

그리하여 온통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나를

살아가게 합니다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자신있게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그러기에 슬픈 사람일 뿐이지만

그렇지만 나는 갖다 버려도

주워 갈 사람 없는 폐인입니다

 

 


 

 

김영승 시인 / 늙고 사오납게 내리는 비

 

 

주룩주룩

수직으로

어느 게 수직인지도

모르게

 

보도블록 위

大 지렁이

 

물뱀처럼

大 포르노 스타처럼

 

동방박사처럼

 

간다

 

 


 

 

김영승 시인 / 겨울 눈물

 

 

내 오늘은 울리

그냥 울리

울면서 그냥

울리

얼어붙었는데

 

왜 울었냐 하면

모르네……

 

그저 TV에

어떤 불쌍한 아이들

 

아빠 없고엄마 아픈

 

아파도 신장 이식해야 할 만큼 아픈

치료비도 없는

신장 떼어주려 해도

미성년자라서 안 되는

 

그 어린 세 자매 보고/ 운다나는 잘/ 운다

 

하나님 아버지

울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웃게도 하소서.

 

 


 

 

김영승 시인 / 잘못 쓴 시

 

 

내일은 한로

아름다운 날

또 보름 있으면 상강

검은 돌에 낟가리에찬 이슬 내리겠네

하연 서리 포근하겠네

 

단풍 들고 눈 내리고

온누리 수레바퀴마저 꽝꽝

얼어붙으면

 

불 지피리 부지깽이 들고, 생솔가지 마른 장작

보릿짚 볏짚 마른 삭정이 탁탁

아궁이 앞에 앉아 고즈넉이

아랫목 화롯가에 앉아 그림자처럼

 

썰매 타러 나간 아들

기다리겠네

 

보글보글 된장국 뚝배기 올려놓고 귀신처럼

손끝 매운 고운 아내

 

바느질하겠네 뜨개질하겠네 쌩쌩 부는

겨울 바람

 

고구마 깎고국수 삶고

 

얼음 깨고 얼개미를 뜨면 (얼개미 : '어레미-바닥의 구멍이 굵은 체'의 사투리)

새까맣게 튀는 새뱅이 (새뱅이: '생이'의 사투리. 토하 土蝦)

 

초가지붕 처마 밑엔

고운 솜털 한 줌 참새,

 

밤은 깊겠네.

 

 


 

 

김영승 시인 / 인생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

술만 잔뜩 퍼마시고…

오래간만에…

 

"죽여버릴 거야…"

십년 공부가 와르르르르르르르…

무너지는 순간이다주저앉아 슬피 흐느껴 운다.

 

이제 초등하교 1학년 짜리 어린 아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있다면 내 아내

진짜 있다면 나한테 있는 걸

 

약이 올라 새빨갛게 독이 올라

폭발 직전, 자살 직전까지

분노가 '滿tank' 되어

참고 또 참고 또 참았다가

 

질질질질질질질질 육신이

내장이 녹아 항문으로

요도로 흘러내리다가

 

누가 갖다준 386고물 컴퓨터

잘못 만졌다고, '또 그러면

죽여버릴 거야!' 아들에게 꽥!

소리를 지르다니 아아아아아아

 

갈 데까지 갔구나 위험하구나 나

그래도 그런 극언 그 누구한테도

안 하고 살았는데 아들한테

그런 폭언을 하다니 아내

들으라고 한 소리지만 아내는...

 

'내가 낳았으니 내가 끝내버릴 거야 또

그러면…'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니 하루종일

쉬지 않고 노래 부르는 아들이

움찔, 일순 경계의 몸짓

 

아빠 이상하다 재빨리

자전거 탄다고 나가버리고

아내는…

 

아내야 그 말이 옳다

그래도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밟을 것은 가려 밟아야 한다

이 가을

바람 거세고 몹시 추운 날

 

내가 겨우 그 따위 곳에나 나가

돈을 벌어온다는 사실이

영 실망이고 불쾌한지…

 

쌓이고 또 쌓이고 쌓여

와르르르르르르르르르…

 

그 말이 옳다 소위 ‘가난’

하지 않았다면 우리 사이에 무슨

싸울 일이 있겠느냐 치욕에 치욕에

또 치욕

나도 치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다 그 스트레스는

나를

쭈글 쭈글 오그려뜨렸다

난롯불에 오그라진

플라스틱 그릇처럼 다시

 

원상복구될 수 있을까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는 놈

또한 가난해서 불편한 것이

부끄러웠던 적도 없었다 나는

 

'변형'되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모순'이지만 내 안에

이 세상의 그 어떤 방패라도

막아낼 수 없는 ‘창’과 이 세상의

그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방패’가

함께 있다 그것이

나의 비극이고 또한…

밭에 갔다온 아내여

밭엔 무와 배추

잘 자라고 있더냐 옆옆집 110호

가난한 船員 현이네 아빠

일하다 다친 손가락 두 개

절단해야 한다고 어제는

연안부두에서 술 마시고 뻗은 걸

옆집 109호 주영이 아빠가

실어왔다고?

불가사리나 도마뱀이여

그 모든 무형무색무취의

유령이여

영혼이여

 

그게 아니었던들

내가 생굴에

소주 한 병을 마시고

돌아올 수 있었겠느냐…

 

내일이면 잊으리 립스틱

짙게 바르고 아들에게사과하리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는 아들에게

꺼내 보이며

 

나는 내 시뻘건 龜頭에

光낸.

 

 


 

 

김영승 시인 / 극빈

 

 

극빈

극광 같은 극빈

國賓같은 극빈 극미한

절세가인의 효빈 같은극빈

쾌락의 극치, 극, 극

태극, 태극 같은 극빈

 

이곳 임대아파트로 이사온 지 내일이면 꼭 1년

월175,300원 그 임대료가 벌써

두 달째 밀렸네

말렸네 나를 말렸네 피를

말렸네, 극빈

극빈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

 

'쪽'도 많이 팔렸구나

그래서

쪽빛(顔色)이 쪽빛(藍色)이구나

이것은 pun 이 아니라

정당한 진술이다 '언표'이다

극빈...

 

'명령'이다

극빈...

 

'반역'이다 극빈

'반역'이다 극빈

 

荒原의body language,

극악한 극빈.

 

 


 

 

김영승 시인 / 옷

 

 

내 최후의 정장은, 아니 최초이자 최후의, 황금빛 찬란한

초호화판 정장은, 이 다음에 어머니 돌아가시면 입을

삼베 상복, 행전에 굴건을 쓰고, 새끼로 腰#하고

짚신에 죽장 든, 내 일생일대의 정장

그러다가 나 죽으면 그 상복 그대로 수의 대신 입혀다오

스무살 이후로 나는 상복만 입고 살았구나

죄수복 같은, 환자복 같은, 아무도 모르는, 그저 평범한내가 입은 옷은 상복 단 한 벌뿐

누더기 상복 한 벌만 입고 살았구나얼핏 보면, 넓은 도폿자락 펄럭이며, 고개 숙이고 타박타박

哭하며 걷는 내 모습을 볼 수도 있었건만

상복을 입고 목욕탕 갔고, 상복을 입고 여관 갔고

아아, 나는 상복을 입고 결혼식을 치렀네

상복을 입고 술집 갔고, 상복을 입고 전철을 탔으며

상복을 입고 수음을 했네, 그렇게 젊음은 갔구나

나는 죄인이었으므로, 그렇게 돌아다녔네, 굵은 삼베 상복

서걱이며 출근을 했고,

사람들은 그러한 나를 전혀 몰랐구나

꽃잎이 진다, 爆竹처럼, 함박눈처럼 하얀 꽃잎이

펑펑펑펑펑 쏟아진다, 흩날린다, 아득하게 暴雪처럼

상복이 진다, 찢어져 흩날린다, 내 몸이, 내가, 흩날린다, 그때까진

죽지 말자, 먼저 죽지 말자, 그 天上의 禮服을

벗지 말자, 强風이

내 야윈 알몸을, 휘감는다

鋼鐵 채찍처럼.

 

 


 

 

김영승 시인 / 저항

 

 

풀도 고운 풀이면

먹었던 사람들

 

고비나물도 구기자 筍도

먹었던 사람들

 

食糧으로

먹었던 사람들

 

舊 소련 核발전소 건설에

강제 동원됐던

강제 노동했던 朝鮮人들

 

느릅나무 껍질을 먹었던

바보 溫達花壇 나팔꽃 밑둥이

예초기에 잘리고

 

죽은 兵士의 워커를 삶아

먹었던 사람들

 

荀子도 태워

먹었던 사람들

잤던 사람들

하늘 밑이고코스모스 大平原인

大地의

내 그림자 위이다

 

쓰레기통 뒤져

복어알 끓여 먹고 죽는

친구 사이 몇 명

사람들

참 추운 날의

곱은 손

사람들

 

 


 

김영승(金榮承) 시인

1959년 인천에서 출생.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졸업. 1986년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반성·시〉 외 3편의 시 를  발표하며  詩作  활동  시작. 시집으로 『차에 실려가는 차』,  『취객의 꿈』,  『아름다운 폐인』 ,  『몸 하나의 사랑』,『권태』,『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 『화창』, 『흐린 날 미사일』이 있음. 2002년 제3회 현대시작품상 수상. 2010년 제5회 불교문예작품상 수상. 2011년 제29회 인천시문화상 수상. 제13회 지훈문학상 수상. 2014년 제1회 형평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