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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곽경효 시인 / 적소에 들다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8.

곽경효 시인 / 적소에 들다

 

 

오랫동안 내 안에서 떠돌던 것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득한 언어의 그림자

 

나무 한 그루가 한 나라와 같다면

수많은 나무가 뿌리내린 세상은

얼마나 견고한 요새인가

 

대숲에 가서 보았다

침묵과 절정 사이에

수직으로 내리꽂힌 수천수만의 칼

 

저 곧고 푸른 것이 정신이라니

잘 벼린 문장 하나 붙잡고

가슴을 스윽 베이고 싶다

피 흐르는,

내 몸이 꽃으로 피는 독 毒

천 년 후에도

 

 


 

 

곽경효 시인 / 너라는 이름은

 

 

당신 앞에 너라는 이름으로 서기 위해

나는 불면의 밤으로 숙성되어 왔다

 

매일매일 잠깐씩 당신을 생각했고

그리고 어김없이 저녁이 찾아왔다

당신을 너라고 부를 수 없는 밤에

내 몸에는 가시가 돋았다

당신이 가시에 찔리는 불온한 상상을 했고

잊고 싶은 기억과 잊을 수 없는 기억 사이에서

갈팡질팡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불면의 밤을 견디는 동안

어느 사이 당신의 이름은 맹목(盲目)이 되었다

나는 다시 너에게로 출렁인다

 

생각해보니

너는 나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곽경효 시인 / 모래바람

 

 

오랫동안 모래바람이 불어왔다

 

내 몸을 뚫고 지나간 바람은

한 번도 제 몸을 보여 준 적이 없다

맨땅에 수많은 실금을 그어놓았을 뿐

물 위에

발자국 위에

 

어둠의 통점을 가지고 있는 나무는

썩지 않는 뿌리를 가졌다

꽃 피우지 못해

새 한 마리 깃들지 않는다 해도

잎사귀 뒤에 또 한 잎

제 상처를 놓아두고

 

들리는가

슬픔의 밑바닥에서

하늘을 향해 말을 걸고 있는

 

 


 

 

곽경효 시인 / 소통

 

 

대합탕을 끓인다

날선 칼을 들이대도 꿈쩍 않던 몸이

한순간 허욕의 불길 앞에 쩍-

제 속을 다 보여준다

단숨에 풀어버리는 몸의 결박

소통이란 저토록 쉬운 것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고

세상을 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몸에 집착했으므로

어느 것에도 가까이 가지 못했다

차라리 거짓말 같은 희망을

쾅쾅 내리쳐 부수고 싶었을 뿐

모래알처럼 바스락거리는

불면의 밤이 몇 번

또 슬픔에 매달려 한나절

 

어느 사이 사막의 바람처럼

더운 체온이 나를 훑고 지나간다

갇혀 있던 말들을 하나씩 꺼내서

허공에 날려 보낸다

 

한 조각의 뼈도 남지 않은 내 속살

 

 


 

 

곽경효 시인 / 아집을 깨물다

 

 

호두를 깨트려보니

통통한 벌레 한 마리가 고개를 내민다

견고하다고 믿어온 세상에도 빈틈이 있었으니

 

내 욕망은 빈 배와 같아서

껍데기를 뚫고 들어 온 네가

내 속살을 갉아 먹는 동안

자주 덜거덕거렸다

 

단단하지 못했던 날들이다

눈 앞의 풍경에다 빗장을 걸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 안에

또 다른 세계를 슬어놓은 줄도 모른 채

 

신념이라는 것 부르지 않아도 온다

 

말없이 고요한 순간에

불현듯

뒷덜미를 낚아채듯이

 

 


 

 

곽경효 시인 / 자작나무, 흰 뼈로 서다

 

 

그 숲에 들어서니

나무들 일제히 등불을 켠다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온몸으로 불을 밝히고 있다

 

침묵으로 견뎌온 시간의 눈금이 저리 곧은가

 

세상의 꽃들이 꿈처럼 피었다 지고

바람은 소리 없이 밀려왔다 또 밀려간다

깃발처럼 흔들리는 이파리는

곧 지워지고 말 생의 한 부분일 뿐

 

나무에 새겨진 무늬를 바라본다

환하게 꽃피는 생애 가지지 못했으나

꺾이지 않는 한 줄기 등뼈를 지녔으니

 

마음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으려

제 몸의 서슬로 하얗게 빛나고 있는

마른 네 뼈마디,

 

적막한 자리에서 홀로 깊어지는 사랑아

 

 


 

 

곽경효 시인 / 존재의 이유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차마 나를 버릴 수 없어

마음을 버렸다

 

당신, 어느새 내 심장을 쏘았는가

화살처럼 가슴에 박혀

바르르 떨고 있는 날카로운 기억들

바람이 불 때마다

온몸으로 통증이 번져간다

 

의심했어야 했다

마음의 행방을 물었어야 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천 년 동안의 내 기다림

 

 


 

 

곽경효 시인 / 중독

 

 

말 보다 먼저 목이 메일 때가 있다

 

지독한 마음을 버리기 위해서

이별을 하는 것이라고

그 사람이 돌아서 간다

절정의 순간, 놓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던가

하지만

순간이라는 말 너무 아파서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막무가내의 슬픔이다

내 이별에는 눈물이 없다

젖었다가 이내 마르는 가벼운 몸을 가졌을 뿐

이제 난 네 몸짓에 간섭하지 않는다

가슴팍을 꽉 깨물고 놓지 않는 말의 턱뼈

그것이 너의 이름이다

차마 버릴 수 없는 오래된 습관이라는

 

 


 

곽경효 시인

2005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달의 정원이 있음. 한국시인협회원, 계간 디카시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