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시인 / 사라진 손바닥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2004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
나희덕 시인 / 부패의 힘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
- 시집 <그곳이 멀지않다>(민음사,1997)
나희덕 시인 / 산속에서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구나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비,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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