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시인 / 폭설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가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 자꾸 폭설로 지워 주신다.
김광규 시인 / 부끄럼이 없는 날
우리의 선인들 가운데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노래한 시인이 있었고 소설을 써서 부끄럼을 가르쳐 준 작가도 있었다 하루 또 하루 마음속으로 요리조리 계산을 하면서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스스로 되물어 본 적도 많았다 우리의 바탕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믿어 온지도 오래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모른다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이 세상으로 쫓겨난 그때부터 왜 곳곳에서 「부끄럽지도 않으냐」는 말이 욕설로 쓰이게 되었는지 그렇다면 바로 부끄럼이 없는 날 우리는 가장 부끄럽지 않은가
김광규 시인 / 뿌리의 기억
땅속이 캄캄해 너무나 답답해 견딜 수 없어 저 굵은 소나무 뿌리들 슬며시 땅 밖으로 다리를 내밀었을까 처음 보는 햇빛 눈부셔 움찔 멈추는 순간 그대로 우불꾸불 굳어 버렸을까 아니면 땅 밖으로 가출한 뿌리들 땅속으로 다시 불러들이기를 저 늙은 소나무가 잊어버린 것일까 등산객들에게 밟혀 반들반들 닳아버린 소나무 뿌리들 땅 위의 가벼움 참을 수 없어 끝내 땅속으로 되돌아가버린 뿌리들의 사춘기가 잠깐 땅 위의 기억으로 남은 듯
김광규 시인 / 나홀로 집에
복실이가 뒷다리로 일어서서 창틀에 앞발 올려놓고 방 안을 들여다본다 집 안이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나 보다 오후 늦게 마신 커피 덕분에 밀린 글쓰기에 한동안 골몰하다가 무슨 기척이 있어 밖으로 눈을 돌리니 밤하늘에 높이 떠오른 보름달이 창 안을 들여다본다 모두들 떠나가고 나 홀로 집에 남았지만 혼자는 아닌 셈이다
김광규 시인 / 저녁나절
썰물이 빠진 뒤 뭍으로 길게 닻을 던진 채 개펄 바닥에 주저앉아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는 거룻배들 정물로 머무는 동안 소금의 하얀 발자국 조금씩 드러날 때 말나루 먼 바다에서 아련히 밀물 들어오는 소리 갈대숲 어느새 물에 잠기고 물새들 날카롭게 지저귀고 잠에서 깨어난 거룻배들 물 위로 떠오르고 황혼의 냄새 불그스레 번져갈 때 조약돌처럼 널린 땅 위의 기억들 적시며 밀려오는 파도 어두워가는 여생의 하루
김광규 시인 / 가을 나비
광장 가설무대의 조명과 소음이 참을 수 없이 망막과 고막을 찢어대는 저녁 시청 앞 광장 잔디밭에서 마주친 그 노시인은 온기 없는 손으로 악수를 건넸다 걷기조차 힘든 육신을 무겁게 끌고 어둠 속으로 천천히 멀어지는 모습 되돌아보니 50년 전에 산 책 한 권 이제는 겉장이 너덜너덜 해진 그의 시집 서명이라도 받아둘 것을 싸늘한 늦가을 밤 낙엽처럼 떨어질 듯 자칫 땅에 닿을 듯 힘겹게 날아가버린 가을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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