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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광규 시인 / 폭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7.

김광규 시인 / 폭설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가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 자꾸 폭설로 지워 주신다.

 

 


 

 

김광규 시인 / 부끄럼이 없는 날

 

 

우리의 선인들 가운데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노래한 시인이 있었고

소설을 써서 부끄럼을 가르쳐 준

작가도 있었다

하루 또 하루 마음속으로

요리조리 계산을 하면서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스스로 되물어 본 적도 많았다

우리의 바탕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믿어 온지도 오래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모른다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이 세상으로

쫓겨난 그때부터 왜 곳곳에서

「부끄럽지도 않으냐」는 말이

욕설로 쓰이게 되었는지

그렇다면 바로 부끄럼이 없는 날

우리는 가장 부끄럽지 않은가

 

 


 

 

김광규 시인 / 뿌리의 기억

 

 

땅속이 캄캄해 너무나

답답해 견딜 수 없어

저 굵은 소나무 뿌리들

슬며시 땅 밖으로 다리를

내밀었을까 처음 보는 햇빛

눈부셔 움찔 멈추는 순간 그대로

우불꾸불 굳어 버렸을까 아니면

땅 밖으로 가출한 뿌리들

땅속으로 다시 불러들이기를

저 늙은 소나무가 잊어버린 것일까

등산객들에게 밟혀 반들반들

닳아버린 소나무 뿌리들

땅 위의 가벼움 참을 수 없어

끝내 땅속으로 되돌아가버린

뿌리들의 사춘기가 잠깐 땅 위의

기억으로 남은 듯

 

 


 

 

김광규 시인 / 나홀로 집에

 

 

복실이가 뒷다리로 일어서서

창틀에 앞발 올려놓고

방 안을 들여다본다

집 안이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나 보다

오후 늦게 마신 커피 덕분에

밀린 글쓰기에 한동안 골몰하다가

무슨 기척이 있어

밖으로 눈을 돌리니

밤하늘에 높이 떠오른

보름달이 창 안을 들여다본다

모두들 떠나가고

나 홀로 집에 남았지만

혼자는 아닌 셈이다

 

 


 

 

김광규 시인 / 저녁나절

 

 

썰물이 빠진 뒤

뭍으로 길게 닻을 던진 채

개펄 바닥에 주저앉아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는 거룻배들

정물로 머무는 동안 소금의

하얀 발자국 조금씩 드러날 때

말나루 먼 바다에서 아련히

밀물 들어오는 소리

갈대숲 어느새 물에 잠기고

물새들 날카롭게 지저귀고

잠에서 깨어난 거룻배들

물 위로 떠오르고

황혼의 냄새 불그스레 번져갈 때

조약돌처럼 널린 땅 위의 기억들

적시며 밀려오는 파도

어두워가는 여생의 하루

 

 


 

 

김광규 시인 / 가을 나비

 

 

광장 가설무대의 조명과 소음이

참을 수 없이 망막과 고막을 찢어대는 저녁

시청 앞 광장 잔디밭에서 마주친 그

노시인은 온기 없는 손으로

악수를 건넸다

걷기조차 힘든 육신을 무겁게 끌고

어둠 속으로 천천히 멀어지는 모습

되돌아보니 50년 전에 산

책 한 권 이제는 겉장이

너덜너덜 해진 그의 시집

서명이라도 받아둘 것을

싸늘한 늦가을 밤 낙엽처럼

떨어질 듯 자칫 땅에 닿을 듯

힘겹게 날아가버린 가을 나비

 

 


 

김광규 시인

1941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 및 同 대학원 졸업.1975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하여 데뷔. 1983 <귄터 아이히 연구> 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저서로는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크낙산의 마음』, 『좀팽이처럼』, 『물길』,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하루 또 하루』 등 10권의 시집과 『대장간의 유혹』,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누군가를 위하여』 등. 『오늘의 작가상, 녹원 문학상, 김수영 문학상, 편운 문학상, 대산 문학상, 이산 문학상, 시와 시학 작품상 수상과  2006년도 독일 언어문학 예술원의 프리드리히 군돌프상과 2008년도 이미륵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