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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미 시인 / 비망록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

김경미 시인 / 비망록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 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他人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 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 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잇몸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 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김경미 시인 / 각도

 

 

가수이자 배우였던 프랭크 시나트라는 말했다

― 고개를 들어라. 각도가 곧 당신의 태도다

 

팝아트 회화의 대가인 앤디 워홀은 말했다

― 조각품은 모든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인생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종종 잊어버려서 문제다

 

이집트 피라미드의 삼각형 각도는 정확히

‘51도 52분’

모래를 쌓을 때 가장 높이 쌓을 수 있는 각도.

넘어서면 모래가 더는 위로 쌓이지 않고

흘러내리는 각도다

 

고개를 들어 각도를 높이는 것

고개를 숙여 각도를 낮추는 것

시선 높이의 모든 각도를 한 바퀴 도는 것

 

각도가 곧 존재다

 

 


 

 

김경미 시인 / 피아노소리

 

 

내 머릿속으로는 늘 쾅! 하고 놀람 공포 충격의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두 손으로 한꺼번에 모든 건반을 누르는 쾅! 내가 속았다 쾅! 실패했다 쾅쾅! 너는 못났다 콰콰쾅! 끝장이다 콰콰쾅! 네가 싫다 쾅 콰콰쾅! 이걸 막느라 한사코 청춘을 다 바쳤다 누가 피아노 앞에 앉지 못하도록 누구도 피아노 근처에 가지 못하도록 내 앞에서 피,자도 얘기하지 못하도록 멀리멀리 떨어져서

 

 


 

 

김경미 시인 / 흉터

 

 

하루 종일 사진 필름처럼 세상 어둡고

몸 몹시 아프다

마음 아픈 것보다는 과분하지만

겨드랑이 체온계가 초콜릿처럼 녹아내리고

온 몸 혀처럼 붉어져

가는 봄비 따라 눈빛 자꾸 멀어진다 지금은

아침인가 저녁인가 나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빈 옷처럼 겨우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본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온갖 꽃들이 다 제 몸을 뚫고 나와 눈부시다

나무들은 그렇게 제 흉터로 꽃을

내지 제 이름을 만들지

내 안의 무엇 꽃이 되고파 온몸을 가득

이렇게 못질 해대는가

쏟아지는 빗속에 선

초록 잎들이며 단층집 붉은 지붕들이며

비 맞을수록 한층 눈부신 그들에

불쑥 눈물이 솟는다 나 아직 멀었다

아직 멀었다

 

 


 

 

김경미 시인 / 질-改作

 

 

어머니는, 옷은 떨어진 걸 입어도 구두만큼은

비싼 걸 신어야한다 아버지는, 소고기는 몰라도

돼지고기 만큼은 최고 비싼 질을 먹어야 한다

그렇다 화장하다 만 듯 사는 친구는, 생리대만은 최고급이다

먹는 입 싸도 칫솔에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는,

누구는 귀를 잘라 팔지언정 음악만은 기어이 좋은 걸 쓴다.

다들 세상의 단 하나쯤은 질을 헤아리니

그렇다 라일락꽃들의 불립문자 탁발의 봄밤 혹은

 

청색 다도해의 저녁 일몰이야말로 아니다 연애야말로

삼각관계야말로 진정 질이 전부이다 고난이야말로

매혹의 우단 벨멧 검은 미망인 기품으로

잘 지어입혀야 한다 몸이야말로 시계를 꺼낼 수 없는 곳

영혼이든가? 기도야말로

그렇다! 품종이 좋은 하늘을 써야 한다 관건은,

가장 비싼 것 하나쯤엔 서슴없이 값을 치르니 귀함이

 

가장 싼 셈, 숨만큼은 정말 제대로 비싼 값을 치르는 것

다 쓴 이수시개처럼 봄햇빛들 쏟아지는 오후

싸구려 플라스틱 용품들 한없이 늘어놓아진 봄길에

값이여 말 자꾸 많이 하지 말아라

 

 


 

 

김경미 시인 / 열애의 書

 

 

개나리꽃이 터졌습니다 노랗게

진달래꽃이 터졌습니다 붉게

터진 그들 곁에서 나도 핍니다 핍니다

지난 겨울엔 정말 늘 찬밥이었지요

무엇이던 빨리 버리라고만 하는 사람들 틈에서

사랑에 대한 노력은 갈수록 불온으로 몰리고

나라를 문란히 하지 않기 위해서

사소한 악도 불륜처럼 두려웠어요

 

이제는 산이 화투빛으로 피었습니다

누워 있는 들도 그렇게 피엇습니다

강도 그렇게 핍니다

그들 곁에서 내 사랑도 무차별로 터집니다

 

따뜻한 밥으로 끓어납니다

 

 


 

김경미(金京眉) 시인

1959년 서울에서 출생. 한양대학교 사학과 졸업.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비망록〉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실천문학사,1989),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창작과비평, 1995), 『쉬잇, 나의 세컨드는』(문학동네, 2001)『고통을 달래는 순서』(창비, 2008)와 사진 에세이집 『바다 내게로 오다』가 있음. 2010. 서정시학 작품상 수상. 현재 MBC 라디오 방송국 스크립터로 근무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