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시인 /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 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더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4』(조선일보 연재, 2008)
정끝별 시인 / 두부하기
출생의 비밀처럼 자루 속 누런 콩들이 술술 샌다 이야기는 그렇게 실수로 시작된다
라스트 신은 비가 내리는 늦여름의 저녁식탁, 숟가락 개수와 메뉴를 결정해야 해
물먹다 나왔는데 또 물먹으며 들어간다 시간의 맷돌은 돌아가고 똑딱똑딱 떨어져 고인 너의 나날은 푹푹 삶아져야 고소해지고 거품을 잘 거둬내야 순해진다
어쨋든 매순간의 물과 불 앞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묵묵한 캐릭터가 필요해
오래된 짠물은 너의 단맛을 끌어올려준다 뜨거운 장마를 불러오는 건 떼구름이다 울렁이는 웅얼거림과 어처구니없는 울먹임이 먼 곳의 몸짓처럼 떼지어 엉겨 떠올랐다가 젖은 무명보자기에 싸여 단단해지는 이 플롯을 구원이라 할까 벌이나 꿈이라 할까
그리하여 조금 더 담담한 목소리와 조금 더 묵묵한 표정으로 맞이할 저녁식탁에서
오늘도 만만한 희망으로 만만찮은 서사를 완성하려는,
한 번도 네게 말 걸지 않고 콩밭만 매던 말과 한 번도 널 마음에 담지 않고 콩밭에 간 마음이 네가 써내려가야 갈 흰 밤처럼 깊다
그런 밤 어김없이 술술 새는 이야기 씨들이 부드러운 망각처럼 불려지고 있다 퉁퉁하다
<<시와함께>> 2021. 봄
정끝별 시인 / 사랑
나오는 문은 있어도 들어가는 문이 없는
뜨겁게 웅크린 네 늑골 저 천길 맘속에 들어앉은 수천 년의 석순 끝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너를 향해 한없이 녹아내리는 몸의 꽃이 만든 몸의 가시가 만든 한번 열려 닫힐 줄 모르는 다 삭은 움막처럼 바람 속에서 발효하는 들어가는 문은 있어도 나오는 문이 없는
그 앞에서 언제나 오줌이 마려운
정끝별 시인 / 어느 시인의 인터뷰에서
시인이라는 종신 미탈옥수가 되어 노래한다 죽음의 탈출로를 찾아 나선 이 파란 파노라마를 시에 옮기지 못한다면?
늘 뭔가의 끝을 산다 너는 폐허라서 너에게 시는 끝나지 않는 희망이라서 시를 쓸 때 간절한 종교가 된다 너는 네가 원하는 너에게 기꺼이 가까워진다
종말보다 미래를 믿는다 끝내는 것보다 돌아가는 길이 더 멀어서다 너는 잠의 시간보다 별의 시간을 믿는다 살아내는 것보다 상상하는 것이 더 어려워서다
몇몇 시는 정말로 다른 네가 되게 했고 결국은 너이게 했다 그런 시는 멀수록 기어이 돌아오게 하는 지도와도 같아서 가장 촘촘한 등고선에 지금을 던질 수 있었으니
던진 것들부터 사라졌다 봄눈이 내려앉듯 사계절의 망각이 쌓이는 묘혈에 앉아 지나가는 파노라마를 바라보며 네 시의 한 컷만은 파랗게 파랗게!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란 없다 잊히지 않는 인연도 없다 파도처럼 밀려가고 밀려가는 네 영혼은 새처럼 가여웠겠구나 그러니 네 시의 겨드랑이는 가없이 가벼웠겠구나
정끝별 시인 / 춤
내 숨은 쉼이나 빔에 머뭅니다 섬과 둠에 낸 한 짬의 보름이고 가끔과 어쩜에 낸 한 짬의 그믐입니다
그래야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내 맘은 뺨이나 품에 머뭅니다 님과 남과 놈에 깃든 한 뼘의 감금이고 요람과 바람과 범람에 깃든 한 뼘의 채움입니다
그래야 점이고 섬이고 움입니다
끔만 같은 잠의 흠과 틈에 든 웃음이고 짐과 담과 금에서 멈춘 울음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두 입술이 맞부딪쳐 머금는 숨이 땀이고 힘이고 참이고
춤만 같은 삶의 몸부림이나 안간힘이라는 겁니다
정끝별 시인 / 기나긴 그믐
소크라테스였던가 플라톤이었던가 비스듬히 머리 괴고 누워 포도알을 떼먹으며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며 몇 날 며칠 디스커션하는 거 내 꿈은 그런 향연이었어
누군가와는 짧게 누군가와는 오래
벌거벗고 누운 그랑 오달리스크처럼 공작새 깃털로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살짝 돌아서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는 팜므의 능선들 그 파탈의 능금을 깨물고 싶었어
누군가에게는 싸게 누군가에게는 비싸게
오 마리아의 팔에 안긴 지저스 크라이스트! 누군가의 품에 그렇게 길게 누워 나 다 탕진했노라 쭉 뻗은 채 이 기립된 생을 마감하고 싶었어
누군가는 하염없이 울고 누군가는 탄식조차 없고
검은 관 속에 누운 노스페라투 백작처럼 그날이 그날인 이 따위 불멸을 저주하며 첫닭이 울 때까지 아침빛에 스러질 때까지 내 사랑의 이빨을 누군가의 목에 꽂고 싶었어
누군가처럼 목욕탕에서 침대에서 누군가처럼 길바닥에서 관속에서
다시 차오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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