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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끝별 시인 /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

정끝별 시인 /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 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더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4』(조선일보 연재, 2008)

 

 


 

 

정끝별 시인 / 두부하기

 

 

출생의 비밀처럼 자루 속 누런 콩들이 술술 샌다

이야기는 그렇게 실수로 시작된다

 

라스트 신은 비가 내리는 늦여름의 저녁식탁, 숟가락

개수와 메뉴를 결정해야 해

 

물먹다 나왔는데 또 물먹으며 들어간다

시간의 맷돌은 돌아가고 똑딱똑딱 떨어져

고인 너의 나날은 푹푹 삶아져야 고소해지고

거품을 잘 거둬내야 순해진다

 

어쨋든 매순간의 물과 불 앞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묵묵한 캐릭터가 필요해

 

오래된 짠물은 너의 단맛을 끌어올려준다

뜨거운 장마를 불러오는 건 떼구름이다

울렁이는 웅얼거림과 어처구니없는 울먹임이 먼 곳의

몸짓처럼 떼지어 엉겨 떠올랐다가

젖은 무명보자기에 싸여 단단해지는 이 플롯을

구원이라 할까 벌이나 꿈이라 할까

 

그리하여 조금 더 담담한 목소리와

조금 더 묵묵한 표정으로 맞이할 저녁식탁에서

 

오늘도 만만한 희망으로 만만찮은 서사를 완성하려는,

 

한 번도 네게 말 걸지 않고 콩밭만 매던 말과

한 번도 널 마음에 담지 않고 콩밭에 간 마음이

네가 써내려가야 갈 흰 밤처럼 깊다

 

그런 밤 어김없이 술술 새는 이야기 씨들이

부드러운 망각처럼 불려지고 있다 퉁퉁하다

 

<<시와함께>> 2021. 봄

 

 


 

 

정끝별 시인 / 사랑

 

 

나오는 문은 있어도 들어가는 문이 없는

 

뜨겁게 웅크린 네 늑골

저 천길 맘속에

들어앉은

수천 년의 석순 끝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너를 향해 한없이 녹아내리는

몸의 꽃이 만든

몸의 가시가 만든

한번 열려 닫힐 줄 모르는

다 삭은 움막처럼

바람 속에서 발효하는

들어가는 문은 있어도 나오는 문이 없는

 

그 앞에서 언제나 오줌이 마려운

 

 


 

 

정끝별 시인 / 어느 시인의 인터뷰에서

 

 

시인이라는 종신 미탈옥수가 되어 노래한다 죽음의 탈출로를 찾아 나선 이 파란 파노라마를 시에 옮기지 못한다면?

 

늘 뭔가의 끝을 산다 너는 폐허라서 너에게 시는 끝나지 않는 희망이라서 시를 쓸 때 간절한 종교가 된다

너는 네가 원하는 너에게 기꺼이 가까워진다

 

종말보다 미래를 믿는다 끝내는 것보다 돌아가는 길이 더 멀어서다 너는 잠의 시간보다 별의 시간을 믿는다

살아내는 것보다 상상하는 것이 더 어려워서다

 

몇몇 시는 정말로 다른 네가 되게 했고 결국은 너이게 했다 그런 시는 멀수록 기어이 돌아오게 하는 지도와도 같아서 가장 촘촘한 등고선에 지금을 던질 수 있었으니

 

던진 것들부터 사라졌다 봄눈이 내려앉듯 사계절의 망각이 쌓이는 묘혈에 앉아 지나가는 파노라마를 바라보며 네 시의 한 컷만은 파랗게 파랗게!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란 없다 잊히지 않는 인연도 없다 파도처럼 밀려가고 밀려가는 네 영혼은 새처럼 가여웠겠구나 그러니 네 시의 겨드랑이는 가없이 가벼웠겠구나

 

 


 

 

정끝별 시인 / 춤

 

 

내 숨은

쉼이나 빔에 머뭅니다

섬과 둠에 낸 한 짬의 보름이고

가끔과 어쩜에 낸 한 짬의 그믐입니다

 

그래야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내 맘은

뺨이나 품에 머뭅니다

님과 남과 놈에 깃든 한 뼘의 감금이고

요람과 바람과 범람에 깃든 한 뼘의 채움입니다

 

그래야 점이고 섬이고 움입니다

 

끔만 같은 잠의

흠과 틈에 든 웃음이고

짐과 담과 금에서 멈춘 울음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두 입술이 맞부딪쳐 머금는 숨이

땀이고 힘이고 참이고

 

춤만 같은 삶의

몸부림이나 안간힘이라는 겁니다

 

 


 

 

정끝별 시인 / 기나긴 그믐

 

 

소크라테스였던가 플라톤이었던가

비스듬히 머리 괴고 누워 포도알을 떼먹으며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며 몇 날 며칠 디스커션하는 거

내 꿈은 그런 향연이었어

 

누군가와는 짧게

누군가와는 오래

 

벌거벗고 누운 그랑 오달리스크처럼

공작새 깃털로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살짝 돌아서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는 팜므의 능선들

그 파탈의 능금을 깨물고 싶었어

 

누군가에게는 싸게

누군가에게는 비싸게

 

오 마리아의 팔에 안긴 지저스 크라이스트!

누군가의 품에 그렇게 길게 누워

나 다 탕진했노라 쭉 뻗은 채

이 기립된 생을 마감하고 싶었어

 

누군가는 하염없이 울고

누군가는 탄식조차 없고

 

검은 관 속에 누운 노스페라투 백작처럼

그날이 그날인 이 따위 불멸을 저주하며

첫닭이 울 때까지 아침빛에 스러질 때까지

내 사랑의 이빨을 누군가의 목에 꽂고 싶었어

 

누군가처럼 목욕탕에서 침대에서

누군가처럼 길바닥에서 관속에서

 

다시 차오를 때까지

 

 


 

정끝별 시인

1964년 전라남도 나주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석, 박사학위. 1988년 '문학사상' 신인 발굴 시 부문에 <칼레의 바다,> 외 6편이 당선. 1994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서늘한 패러디스트의 절망과 모색>으로 당선되어, 시작 활동과 평론 활동을 병행.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시론, 평론집으로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시해설집 『시가 말을 걸어요』 『행복』 『밥』, 산문집 『여운』 『그리운 건 언제나 문득 온다』 . <유심작품상>과 2008년도 <소월시문학상>을 수상. 현재,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