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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탁번 시인 / 사랑 사랑 내 사랑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

오탁번 시인 / 사랑 사랑 내 사랑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암놈 등에 업힌

숫메뚜기의

겹눈 속에 아롱진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박넝쿨에 살포시 앉아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을 흉내낸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나도

메뚜기가 되어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29』(조선일보 연재, 2008)

 

 


 

 

오탁번 시인 / 쥐에 관한 명상

 

 

민박집 천장에서 쥐 달리는 소리 들리면

참말 오랜만에 동갑내기 만난 것 같다

 

쥐불놀이 하다가 눈썹 태우고

시래기죽 먹고 잠든 겨울밤

쥐불연기에 수염을 그슬린 쥐들이

눈썹 태운 나와 더 놀고 싶다는 듯

쥐오줌자국 난 천장을 밤새 달렸다

씨옥수수 갉아먹던 새앙쥐들도

이불 속까지 기어 들어와

내 어린 발가락을 자꾸 깨물었다

고드름이 제 무게에 툭툭 떨어지는

아침이 밝아 오면

내 꿈길까지 따라오며 보채던 쥐들은

일곱 문 반 내 고무신에

봉숭아씨처럼 예쁜

쥐똥만 남겨 놓고 숨어 버렸다

 

쥐 달리는 민박집 천장 아래 누우면

옛 동갑내기의 발자국소리 들린다

 

 


 

 

오탁번 시인 / 눈물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었던 나이가

그러한 맹랑한 자유가

흔하디흔한 눈물만일 줄 알았다

쓸데없는 배설인 줄만 알았다

 

어젯밤 사랑하는 여자와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도

울 수 없었을 때

툭툭털며 그냥저냥 일어섰을 때

눈물이 숨기고 있던 크나큰 자유를

순수를 알았다

 

울고 싶을 때 울 수 없는 나이가 되면서

이 시대의 밤은 높기만 했다

 

죄를 짓고도 죄인 줄 모르는

개똥같은 지성을 미워했다

 

눈물을 기구하며

개처럼 하루 한낮을 기어다녔다

 

 


 

 

오탁번 시인 / 죽음에 관하여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갈아주면서

따뜻한 손으로 내 팔뚝을 만지자

바지 속에서 문득 일어서는 뿌리

나는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다

 

다시 태어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말끔히 하고

환자복 바지를 새로 달라고 했다

.바다 하나 주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했다

.바다 하나요

바지바지 말해도 바다바다가 되었다

 

 


 

 

오탁번 시인 / 엄마

 

 

엄마는 아빠하고 안방에서 자고

나는 동생하고 내 방에서 잔다

 

동생이 자다 깨어 칭얼거려서

엄마를 불러도 대답이 없다

 

엄마 아빠는 무얼 하고 있을까

우는 동생 내가 달래 재운다

 

아침이 되면 아빠가 싱긋싱긋 웃는다

-엄마가 동생공장공장장인 걸 몰라.

 

 


 

 

오탁번 시인 / 사랑하고 싶은 날

 

 

앵두나무 꽃그늘에서

벌떼들이 닝닝 날면

앵두가 다람다람 열리고

앞산의 다래나무가

호랑나비 날개짓에 꽃술을 털면

아기 다래가 앙글앙글 웃는다

 

태초 후

45억 년쯤 지난 어느 날

다랑논에서 올벼가 익어갈 때

청개구리의 젖은 눈알과

알밴 메뚜기의 볼때기에

저녁노을 간지럽다

된장독에 쉬 슬어놓고

앞다리 싹싹 비벼대는 파리도

거미줄 쳐놓고

한나절 그냥 기다리는

굴뚝빛 왕거미도

다 사랑하고 싶은 날

 

 


 

 

오탁번 시인 / 여기쯤에서

 

 

여기쯤에서 그만 작별을 하자

눈 뜨고 사는 이에게는

생애의 벼랑은 언제나 있는 법

거기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

하나 따서 가슴에 달고

뜻 없는 목숨 하나 따서

만났던 그 자리 그 어둠 앞에

우리의 죄로 젖어 있는 추억을 심고

그만 여기쯤에서 작별을 하자

똑같은 항아리가 어느 한쪽에

깨어져서 들어가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도 아니다

우리의 입술은 아침저녁 비가 오고

내 몸에 묻어있는 눈썹 하나

머리칼 한 올이 나의 새벽까지

따라와서 죄를 짓자고 속삭인다 해도

너의 찬 손이 뜨거워지고

나의 안경이 흐려진다 해도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작별을 하자 그만 여기쯤에서 생애의

벼랑에서 뛰어내려 젖은 입술을

입술에 부비며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오탁번 시인 / 우화(羽化)의 꿈

 

 

대나무를 기르는 사람이

영 대쪽같지 않고

난을 기르는 사람이

난커녕 잡초 되어 살아가는

한 많은 한세상

나의 삶이 끝나면

 

불랙홀 근처

조선 소나무 가지 위에

나는 매미나 한 마리 되어

맴맴맴

우주가 떠나가도록

우러는 보고 싶다

 

 


 

 

오탁번 시인 / 낙향(落鄕)을 위하여

 

 

까마득하게 흐려져버린

내 사랑의

호적등본만한 빈터가

실은 내 생애의 전부였음을

이제야 알겠다

술지게미 먹고

깨금발로 뛰어놀던

내 사랑의 빈터에

말 안해도 마음 다 알아줄

아주 예쁜 사람이

살고 있음을

이제야 알겠다

지에밥에 누룩 풀어 담근

술항아리에서

상강날 해거름쯤

술이 익으면

첫서리 내린 들창문

반쯤 열어놓고

마주 앉아 잔 비우고 싶은

내 마음의 노른자위가 될

아주 예쁜 사람을

전생의 꿈을 꾸듯

찾아가야겠다

 

 


 

오탁번 시인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고려대 영문과,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과 박사. 1966년《동아일보》신춘문예 동화 당선,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 시당선, 1996년《대한일보》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생각나지 않는 꿈』『겨울강』『손님』『우리동네』『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등. 1994년 동서문학상, 1997년 정지용문학상 수상. 은관문화훈장. 하버드대학 객원교수, 육군사관학교 교수,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 고려대학 사범대 교수, 현재 고려대 국어교육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