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희 시인 / 새벽밥
새벽에 너무 어두워 밥솥을 열어 봅니다 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습니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무르익고 있습니다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12』 (조선일보 연재, 2008)
김승희 시인 / 구름 밥상
검은 리본이 둘러쳐진 영정사진 아래서 밥을 먹는다 모란꽃 같은 구름이 밥상으로 내려왔다. 아니 모란꽃 같은 밥상이 구름 위로 올라갔다. 이 꽃 같은 구름 밥상, 어이, 어언, 어이, 그런 밥상.
검은 리본이 둘러쳐진 영정사진 아래서 밥을 먹는다. 모란꽃이 뚝뚝 지기 시작하는 밥을 먹는다. 흘러가는 밥상, 언제나 모든 밥상은 흘러가는 밥상이었다, 어이, 어언, 어이, 그런 밥상.
어느 화창한 날 어느 고유한 날 검은 리본 둘러쳐진 영정사진이 되어 나도 식구들 밥 먹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어이, 어언, 어이 그런 날.
파란 원래 구름으로 만들어졌고 정액도 원래 구름으로 만들어졌고 달도 원래 구름으로 만들어졌고 해도 원래 구름으로 만들어졌고 태초에 구름 밥상 어이, 어언, 어이......
김승희 시인 / 애도 시계
애도의 시계는 시계 방향으로 돌지 않는다 시계 방향으로 돌다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다가 자기 맘대로 돌아간다 애도의 시계에 시간은 없다
콩가루도 기도를 할까 콩가루가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콩가루가 기도를 한다면 어떤 기도를 할까 콩가루는 자기를 복원해달라고 기도를 할까 콩가루가 복원될 수 있을까 콩가루에게 어떤 기도가 가능할까
애도의 시계는 그런 기도를 한다 가루가루 빻아져 콩가루들은 날아갔는데 콩가루는 콩가루의 소식을 모르고 콩가루는 콩가루의 주소를 모르고 콩가루는 향수를 모르고
콩가루는 다만 바람 속의 근심으로 바람의 애도를 한다 회오리를 타고 시시때때 애도의 시계는 꿈에서 거꾸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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