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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현종 시인 / 갈증이며 샘물인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

정현종 시인 / 갈증이며 샘물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갈증이며 샘물인

샘물이며 갈증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

갈증이며

샘물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시집『갈증이며 샘물인』(문학과지성사, 1999)

 

 


 

 

정현종 시인 / 있기도 전에 사라지는구나

 

 

미래에 있을 일이

어느덧 지나가고 지나가고,

그 일이 오기도 전에

지나가고 지나가고,

뚜렷하고 아득하다

그 견딜 수 없는 환영(幻影)들!

있기도 전에 사라지는구나

있기도 전에 사라지는구나!

 

 


 

 

정현종 시인 / 눈부신 날

 

 

이렇게 공기가 맑고

햇빛이 눈부신 날에는

저 푸른 하늘이 온몸에 물들고

구름 또한 몸속에 들어온다

파란 하늘이야 흰 구름이야

몸에 가득 차 넘치고

새소리는 그 모든 눈부심을

증폭한다

나는 요컨대 그 속으로

발가벗고 걷고 싶다!

 

 


 

 

정현종 시인 / 시간의 그늘

 

 

시간은 항상

그늘이 깊다.

그 움직임이 늘

저녁 어스름처럼

비밀스러워

그늘은

더욱 깊어진다.

시간의 그림자는 그리하여

그늘의 협곡

그늘의 단층을 이루고,

거기서는

희미한 발소리 같은 것

희미한 숨결 같은 것의

화석(化石)이 붐빈다.

시간의 그늘의

심원한 협곡,

살고 죽는 움직임들의

그림자,

끝없이 다시 태어나는

화석 그림자.

 

 


 

 

정현종 시인 / 보석의 꿈 1

 

 

1

보석 전시회에 갔지.

어두운 방들

진열장 속

집중 조사(照射) 아래

보석 장신구

보석 휴대품들이 놓여 있었어.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루비, 진주, 에메랄드,

오닉스, 오팔, 문스톤, 가닛, 토파즈,

금, 은, 백금, 수정, 칠보, 라피스라줄리……

원석이었다면

어두운 방들은 더욱

땅속이었겠지.

나는 토행손(土行孫)*처럼

보석들이 반짝반짝

또 다른 하늘을 만들어놓고 있는

땅속을 걸어다녔겠지.

하여간 나는 빛이 열어놓은 색이

장엄한 무한 속을

헤매었지, 겨우 숨을 쉬며.

 

2

내 숨결이 거칠어지기도 했어.

그 장신구들로 치장했을 여자들의

유령 때문에,

그 가슴과 팔과 목과 허리의

살결 때문에,

어두운 방에 가득한

오, 그림자의 향기 때문에,

불쑥 나타나

속삭이며

터질 듯이 어둠을 부풀리는

그림자?

그 부재(不在)의 더없는 강력함 때문에.

 

3

전시관을 나왔을 때

기적이 일어났어?

모든 게 보석으로 보였어!

마시고 버린 깡통

플라스틱 병, 종이컵……

나는 놀랐고

미소가 지나가는 듯하였는데?

눈동자가 보석으로 바뀐 것이었어!

 

* 중국의 신마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에 나오는 호걸로, 토둔(土遁)이라는 신기(神技)를 갖고 있어 땅속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잠행할 수 있다.

 

 


 

정현종(鄭玄宗, 1939 ~ ) 시인

1939년 서울시 용산 출생. 연세대학교 철학과, 재학 시절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음. 1965년 대학 졸업 후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현대문학출생>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 2005년에 정년 퇴임. 1990년 '제3회 연암문학상' 수상, 1992년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 1995년 '제40회 현대문학상', 1996년'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