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시인 / 갈증이며 샘물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갈증이며 샘물인 샘물이며 갈증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 갈증이며 샘물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시집『갈증이며 샘물인』(문학과지성사, 1999)
정현종 시인 / 있기도 전에 사라지는구나
미래에 있을 일이 어느덧 지나가고 지나가고, 그 일이 오기도 전에 지나가고 지나가고, 뚜렷하고 아득하다 그 견딜 수 없는 환영(幻影)들! 있기도 전에 사라지는구나 있기도 전에 사라지는구나!
정현종 시인 / 눈부신 날
이렇게 공기가 맑고 햇빛이 눈부신 날에는 저 푸른 하늘이 온몸에 물들고 구름 또한 몸속에 들어온다 파란 하늘이야 흰 구름이야 몸에 가득 차 넘치고 새소리는 그 모든 눈부심을 증폭한다 나는 요컨대 그 속으로 발가벗고 걷고 싶다!
정현종 시인 / 시간의 그늘
시간은 항상 그늘이 깊다. 그 움직임이 늘 저녁 어스름처럼 비밀스러워 그늘은 더욱 깊어진다. 시간의 그림자는 그리하여 그늘의 협곡 그늘의 단층을 이루고, 거기서는 희미한 발소리 같은 것 희미한 숨결 같은 것의 화석(化石)이 붐빈다. 시간의 그늘의 심원한 협곡, 살고 죽는 움직임들의 그림자, 끝없이 다시 태어나는 화석 그림자.
정현종 시인 / 보석의 꿈 1
1 보석 전시회에 갔지. 어두운 방들 진열장 속 집중 조사(照射) 아래 보석 장신구 보석 휴대품들이 놓여 있었어.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루비, 진주, 에메랄드, 오닉스, 오팔, 문스톤, 가닛, 토파즈, 금, 은, 백금, 수정, 칠보, 라피스라줄리…… 원석이었다면 어두운 방들은 더욱 땅속이었겠지. 나는 토행손(土行孫)*처럼 보석들이 반짝반짝 또 다른 하늘을 만들어놓고 있는 땅속을 걸어다녔겠지. 하여간 나는 빛이 열어놓은 색이 장엄한 무한 속을 헤매었지, 겨우 숨을 쉬며.
2 내 숨결이 거칠어지기도 했어. 그 장신구들로 치장했을 여자들의 유령 때문에, 그 가슴과 팔과 목과 허리의 살결 때문에, 어두운 방에 가득한 오, 그림자의 향기 때문에, 불쑥 나타나 속삭이며 터질 듯이 어둠을 부풀리는 그림자? 그 부재(不在)의 더없는 강력함 때문에.
3 전시관을 나왔을 때 기적이 일어났어? 모든 게 보석으로 보였어! 마시고 버린 깡통 플라스틱 병, 종이컵…… 나는 놀랐고 미소가 지나가는 듯하였는데? 눈동자가 보석으로 바뀐 것이었어!
* 중국의 신마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에 나오는 호걸로, 토둔(土遁)이라는 신기(神技)를 갖고 있어 땅속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잠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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