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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영승 시인 / 권태 78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

김영승 시인 / 권태 78

 

 

나는 지금 골이 비었다. 골이 비었는데도 골이 아프다.

생전 하지 않던 이런 말장난까지 하고 있으니 나는 도대체 얼마나 골이 비었는가.

어쩌다가 이렇게 골이 비게 되었을까.

공두병 걸린 누에처럼 도대체가 껍데기다. 통 비었다. 골이 통통 비었다. 통통 튀긴다. 마음을 비우라고 하니까 겨우 마음을 비우겠다며 골을 비워 놓은 놈도 있지만 나는 내가 왜 이렇게 골이 비어져 갔는지 그 원인을 모르겠으니 나의 골빈 상태는 얼마나 심각한 것이냐.

나는 이제, 이런 골빈 새끼, 저런 골빈 년, 그렇게 욕할 수도 없게 되었고, 내가 골이 빈 놈이니까, 누가 골이 비었는지 안 비었는지 모른다. 이렇게까지 남의 골을 비워 놓아야 속이 후련한지 신문도 학교도 교회도 대통령도 자꾸 남의 골을 더 비게 만들고 골을 비게 만들다 만들다 못해 멀쩡한 남의 마누라 골까지 비게 만들고 남의 어머니까지 골빈 할머니로 만들어 놓고 이 골빈 세상을 만났으니 너희 희망이 무엇이냐 노래하는 골빈 우국지사 새끼들 뭐라고 그러면 내가 골이 볐냐 새꺄 하고 팩 골을 내게 만들고 아이 똥누기 싫어 하는 골빈 년에게 자기 빨리 눠라 응 아이 똥꼬 예쁘지 하며 쓰다듬으며 핥으며 혓바닥으로 싹싹 밑 씻어 주는 골빈 새끼들이 인구의 절반이 넘으니 신문은 이래야 한다는 둥 학교는 저래야 한다는 둥 교회는 대통령은 그래야 한다는 둥 지나가는 골빈 놈 붙들고 물어봐라 내 말이 옳으냐 그르냐 그렇게 말할 수도 없고, 십정동 도살장에 나가 갓 잡은 송아지 그 뜨거운 골이나 한바가지 얻어다가 초간장에 찍어먹으며 내 두개골을 깨고 비지나 한 바가지 채울까 누런 코나 가래나 고름이나 정액을 한 바가지 채울까. 말까. 골이 너무 비니까 도대체 골이 빈 것이 티가 안 나는 이점도 있으니.

아이, 골이 비니까 개운하다.

 

 


 

 

김영승 시인 / 권태 501

 

 

실제로, 엉덩이를 까고, 내 야윈 두 다리를 타고 앉아 헥헥,

나로 인하여 기분 좋으소서.

 

 


 

 

김영승 시인 / 권태 882

 

 

43.05kg.

목욕탕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황홀하다.

눈부셔라,

 

무슨 저어 갈 데가 없어서, 험한 바다 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로 저어 간단 말이냐. 희망의 나라로.

인간은 카멜레온보다도 더 가변적인, 시시각각 급조된 한계 상황의 영원한 또라이들.

 

어제는

1992년 10월 28일 수요일. 시한부 종말혼자들이 믿는 소위 휴거 예정일.

양념동말자지(씹)구이나 동말자지(씹)소금구이를 해서 내면 잘 팔릴 텐데.

 

어릴 적 인천의 인현동, 작은 숙부 개(介+心)笠선생이 우리 삼형제를 데리고 자주 갔던 화평동의 「염불집」, 그 그냥 석쇠에 고기를 구워 소금 찍어 먹는 곳, 그 「염불집」은 아직도 신포동에 옮겨져 있는데……

 

살은 다 어디로 갔나. 고기는 누가 다 먹었나.

Enoch Arden이여,

아아, 이런 피조물들……

늙으신 어머니와 형, 그리고 아내와 어린 아들을 보니 눈물만 흐른다.

 

 


 

 

김영승 시인 / 희망 976

 

 

남들이 다듬고 버린

발에 밟혀 질척질척 으깨어지기도 한

김장 배추 무

억세고 질긴 잎을

어머니는 허락받고 주워와

쭉쭉 손으로 길게 찢어 먹게

익으니까 노르스름 빛깔도 고운

별미의 김치를

얌전히 담궈 놓으셨다

 

나는

정신일도 만사불성인 놈-

이 추운 밤

감기 들어 머리가 띵하고

막걸리도 한 잔 마셨으니

뭔가 될 듯도 하다.

 

 


 

 

김영승 시인 / 희망 980

 

 

007영화의 손 코네리, 그 병신 같은 새끼도 늙었다. 늙은 새끼는 다 병신같다. 왜냐하면 늙었으니까.

`칼튼 힐'이라는 스카치 위스키 전속 모델이 되었다. 신문광고에서 보았다.

그 글래머 본드 걸들도 다 병신 같은 년들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은 1996년 12월 24일 화요일,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에 할 일이 없어 가스렌지 후드 그 박스를 분해해서 닦았다.

 

역시 옥반

가효는 만성고다.

어제는 아내에게 극언을 했다.

“이혼이냐 자살이냐……"

또는

“자살이냐 이혼이냐……"

아내는 나보다 세 살 병신 같은 년인데, 내년에 마흔세 살이 된다.

나는 `불혹'이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오늘은 산타클로스, 그 병신 같은 새끼들이 설칠 것이다.

 

 


 

 

김영승 시인 / 희망 989

 

 

과일을 잘 먹는 당신

과일을 잘 먹어서 고맙습니다.

낮잠을 잘 자는 당신

낮잠도 잘 자서 고맙습니다.

 

옷을 공산당여맹위원장같이 입고 다니는 당신

옷을 공산당여맹위원장같이 입고 다녀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픈 당신

 

당신이 아파서 고맙습니다.

 

 


 

 

김영승 시인 / 희망 991

 

 

요즈음 성형수술도 아무나 하는데

얼굴에 긴 칼자국을

그대로 갖고 다니는 사나이는

가난한 사나이다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칼자국을.

이 가을

그 사나이의 긴 칼자국만큼의 가난을.

얼어붙은.

萬頃蒼波/ 數千億묘 사래 긴 밭을

나는

언제 갈려 하나니,

눈물이 난다.

 

 


 

 

김영승 시인 / 반성·序(서)

 

 

언제나 그랬지만

갈수록 개인의 영역이 축소되고 말살되는

시대에 있어서 결코

한 개인의 노래만은 아닌 극복해야 할

자조적 실존의 비극적 아름다움―

상대적 가치로 환산되어

어쩔 수 없이 고도화된 미개한

정태적 표현방식으로 몰수된

그 모든 개별적 사례에 대해서

자아(또는 의식)과 세계(또는 대상)과의 격절현상 속에서

자아(또는 의식)과 세계(또는 대상)의 중간에 놓인

자아(또는 의식)의 주체로서의 또 하나의 자아(또는 의식)

그 또 하나의 자아(또는 의식)에 내재화된

원래의 자아(또는 의식)과 세계(또는 대상)에 대해서

분쇄된 자아(또는 의식)으로 도금된 분쇄된 세계(또는 대상)의

소유주 떠난 단자들

자아(또는 의식)의 편린이 묻은 세계(또는 대상)의 편린

그 비가시적 부유물질

자아(또는 의식)이 세계(또는 대상)에 투사되어 생성된

단자들의 상호 절대 고립된 시공자체로서 완전독립된 개별적 시공이 편만한 전체로서의 시공 속에서

착종된 그 개별적 시공들에 대한 인위적 이합집산과 분류를 획책하는

개체성을 상실한 다수의 전체로서의 의식과

오도된 상호주관성에 대해서

그리하여

인간의 지극한 개체적 자유와 존엄성을 위한

인간과 인간의 완벽한 관계해소를 위해서

제도적 필요성에 의해 박탈된

유화된 인간의 원리성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특수성으로 귀일하여 그 자체로의 정합을 저해하는

외부적 압박에 대해서

특수한 한 개인의 의식이 포착한 특수한 한 대상

가령

악적 필요성에 의해 양산되는 취약한 인간들이

자기방어적으로 분비하는 독성물질에 의해

자가중독에 빠진 거대한 연체동물에 대해서

희로애락이라고 착각된

시공의 함수로 변화하는 위치에너지

그 외부적 자극에 의해 주조되는

비종교적 두상의 안면근의 수축이완에 대해서

―찰흙처럼 오므려 붙인

얼마되지도 않는 얼굴 근육에 힘을 주어 만든

오묘한 표정의 대동소이한 편차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상실한 자의

완전수렴의 꿈

자기동일성 회복을 갈망하는 자들의

갱생자립을 위해서

공인된 폭력을 자행하는 자들의

한 대 쥐어박음에 대한 긴급조치로

실제의 고통보다 더 과장하여 낑낑거리며

불쌍하게 보이려 지적 활동을 하는

내 시계 속의 나의 이웃에 대해서

 

축소지향의 불문율에

냉철한 깨어 있음 속의 인사불성을 연출하는

이성적 존재에 대해서

 

애초에 없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화해와 평정의 변증법적 합일점을 시사하는

이미 모든 정체가 탄로난

정체불명의 불확실한 상징에 대해서

 

자기자신에 대한 자기자신의 대리점으로

호객행위를 하는

만원버스와 만원전철로 귀가하며

자신의 체취와 자신이 먹은 음식을 탄로시키는

무관한 형제들에 대해서

가령

피차 성교하는 사이면서

마주앉은 상대에게 공중전화를 거는

연인들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굴종한

침묵의 다수의

삶의 세계에 대해서

자기자신과 타인을 자기자신을 위한

정신적 육체적 팔일무를 추는 존재로 상정하는

오락적 인간에 대해서

 

가장 오래된 기억 <에덴>의 잠재의식 속에 희석된

죄의식의 발굴제도 같은

난공불락의 논리적 도덕적

유형무형의 환락가와 교회를 입하한

푸줏간 같은 도시의 진열장에 걸린

시편 150편 같은

빨간 고깃덩어리의 단순한 주기적 진동에 대해서

어디든

빨래처럼 널려 나부끼는

열악한 육체와 영혼의 평면도

고등한 우주 무기를 갖춘 자들의 파상공격에 속수무책인

입체적 사고능력이 저열한 자들의 쩔쩔맴

애초부터 싸움이 성립되지 않는

치졸한 어리석음의 균점

설명 불가능한 제반현상

지겨움

내가 모르는 일들에 대해서

<어깨를 겨룬다>는

동물적 어휘의 잔재가 남아 있는

원숭이 우리 앞에 선

원숭이

힘의 소재에 따라 민첩한

열병분열을 하는

영육

인간과 인간끼리 영혼과 육체의

펼친 화음

우리 모두가 수행하는

마스게임과 카드섹션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 그 모든

사유될 수 있고 언표될 수 있는 것으로 대상화된다는 것이

가장 불유쾌하고 기분 잡치는 욕설이 되어 버린

이 해괴망측하게 황홀한 밤

스물거리는 관능에 수없이 까무라치다가

결국 맹숭맹숭해진

끈적끈적한 육체와 영혼의 오르기(Orgie)

그 모든 선천적 후천적 가엾음에 대한

본능적 심미적 도덕적 이성적 종교적 물리적

동정

기실

마귀들의 가장행렬이거나

천국 백성들의 소돔성 수학여행 같은

설레임들과 들뜸의 삶의 세계

선악과 미추와 성속을 초월하여

일부러 노력하여 병신이 되어 가는

<나>와 복수화된 <나>들의

<섞음> <잠기기> <서로 닿기>

<그 밖에> <갑자기> <어처구니없이>

<비체계성> <흐트러짐> <제자리 찾아주기> 등

<훔쳐보기>만을 하는 변태성욕자처럼

자기자신과 세계에 대한 불연속적 보고서의 작성자로 전락한

사실무근한 인간과 인간사와

그리고 <나>라고 하는 개체의 일들을

왜곡되게 기록한 것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서정시.

 

 


 

김영승(金榮承) 시인

1959년 인천에서 출생.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졸업. 1986년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반성·시〉 외 3편의 시 를  발표하며  詩作  활동  시작. 시집으로 『차에 실려가는 차』,  『취객의 꿈』,  『아름다운 폐인』 ,  『몸 하나의 사랑』,『권태』,『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 『화창』, 『흐린 날 미사일』이 있음. 2002년 제3회 현대시작품상 수상. 2010년 제5회 불교문예작품상 수상. 2011년 제29회 인천시문화상 수상. 제13회 지훈문학상 수상. 2014년 제1회 형평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