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 시인 / 열애
손을 베었다 붉은 피가 오래 참았다는 듯 세상의 푸른 동맥속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잘 되었다 며칠 그 상처와 놀겠다 일회용 벤드를 묶다 다시 풀고 상처를 혀로 쓰다듬고 딱지를 떼어 다시 덧나게 하고 군것질하듯 야금야금 상처를 화나게 하겠다 그래 그렇게 사랑하면 열흘은 거뜬히 지나가겠다 피흘리는 사랑도 며칠은 잘 나가겠다 내 몸에 그런 흉터많아 상처 가지고 노는 일로 늙어버려 고질병 류마티스 손가락 통증도 심해 오늘밤 그 통증과 엎치락 뒤치락 뒹굴겠다 연인 몫을 하겠다 입술 꼭꼭 물어뜯어 내 사랑의 입 툭 터지고 허물어져 누가 봐도 나 열애에 빠졌다고 말하겠다 작살나겠다.
-시집『열애』(민음사, 2007)
신달자 시인 / 녹음 앞에서
저 초록안으로 몸 던져 물들어 버릴까
후끈하게 달아오른 검푸른 초록 저 안에 아직 내가 못 본 세상이 수런거리고 있는가
너무 깊어 달려가도 닿지 못 할 것 같다
호수인가? 세상에서 가장 깊은 진초록 호수 헐떡이는 슬픔까지 껴안고 깊어지는 호수
그래 몸 던져 물들어 버리자
얼마 가지 않아 속마음까지 붉은 몸으로 단풍들다가
끝내 차가운 땅위로 떨어질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말이다.
ㅡ《열린시학》 2016 가을호
신달자 시인 / 저 거리의 암자
어둠이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 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야간 여행을 떠납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된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속 풀이 국물이 짜글짜글 냄비에서 끓고 있습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젓가락으로 집던 산 낙지가 꿈틀 상위에 떨어져 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내지 못합니다 답답한 것이 산 낙지뿐입니까 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 냅니다 비워진 소주병이 놓인 플라스틱 작은 상이 휘청 거립니다 마음도 다리도 휘청거리는 밤거리에서 조금씩 비워지는 잘 익는 감빛 포장마차는 한 채의 묵묵한 암자입니다 새벽이 오면 포장마차 주인은 밤새 지은 암자를 걷어 냅니다. 손님이나 주인 모두 하룻밤의 수행이 끝났습니다 잠을 설치며 속을 졸이던 대보산의 조바심도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거리의 암자를 가슴으로 옮기는 데 속을 쓸어내리는 하룻밤이 걸렸습니다 금강경 한 페이지가 겨우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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