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 시인 / 찔레꽃
그해 봄 결혼식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이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 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얘ㅆ라 벙어리처럼 하얘ㅆ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계간『실천문학』(2006, 여름호)
송찬호 시인 / 페인트칠하기
개에게 페인트칠을 했다 꾀죄죄한 흰 털을 파랗게 칠했다 그랬더니 파란 개가 되었다
파랗게 되고부터 개의 행동양식이 바뀌었다 앞발로 자주 땅을 팠다 먼 개의 조상을 찾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개와 인간 사이의 새로운 계약을 요구했다 여행 계획을 짜고 마르크스를 읽기 시작했다
개의 파란 꼬리는 로켓 추진 같다 조금 전에도 엄청난 속도로 내 앞을 달려 지나갔다 주위가 저리 분주하니 정작 해야 할 지붕 칠하기 작업은 당분간 미뤄둘 수밖에 없다
파란 개가 컹컹 짖는다 파랗게 짖는다 새롭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하다 다음번엔 차분한 보랏빛 페인트를 준비해볼까 파란 털이 꾀죄죄해질 즈음에
송찬호 시인 / 책베개
커다란 덩치의 곰이 도서관 책을 잔뜩 빌려 간다 이제 곧 겨울잠을 자야 할 텐데 언제 그 책을 다 읽지요?
사서님, 대출 도서 반납은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깊은 겨울잠에 들면 내 머리맡에 와서 책만 살짝 빼 가세요
-송찬호 동시집 {여우와 포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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