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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찬호 시인 / 찔레꽃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

송찬호 시인 / 찔레꽃

 

 

그해 봄 결혼식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이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 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얘ㅆ라  벙어리처럼 하얘ㅆ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계간『실천문학』(2006, 여름호)

 

 


 

 

송찬호 시인 / 페인트칠하기

 

 

개에게 페인트칠을 했다

꾀죄죄한 흰 털을

파랗게 칠했다

그랬더니 파란 개가 되었다

 

파랗게 되고부터

개의 행동양식이 바뀌었다

앞발로 자주 땅을 팠다

먼 개의 조상을 찾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개와 인간 사이의

새로운 계약을 요구했다

여행 계획을 짜고

마르크스를 읽기 시작했다

 

개의 파란 꼬리는

로켓 추진 같다

조금 전에도 엄청난 속도로 내 앞을 달려 지나갔다

주위가 저리 분주하니 정작 해야 할 지붕 칠하기 작업은

당분간 미뤄둘 수밖에 없다

 

파란 개가 컹컹 짖는다

파랗게 짖는다

새롭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하다

다음번엔 차분한 보랏빛 페인트를 준비해볼까

파란 털이 꾀죄죄해질 즈음에

 

 


 

 

송찬호 시인 / 책베개

 

 

커다란 덩치의 곰이 도서관 책을 잔뜩 빌려 간다

이제 곧 겨울잠을 자야 할 텐데

언제 그 책을 다 읽지요?

 

사서님, 대출 도서 반납은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깊은 겨울잠에 들면

내 머리맡에 와서

책만 살짝 빼 가세요

 

-송찬호 동시집 {여우와 포도}에서

 

 


 

송찬호 시인

1959년 충북 보은 출생. 경북대학교 독문학과 졸업. 1987년 <우리시대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10년 동안의 빈 의자』 『붉은 눈, 동백』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분홍 나막신』, 디카시집 『겨울 나그네』, 동시집 『저녁별』 『초록 토끼를 만났다』 『여우와 포도』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