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탁번 시인 / 사랑 사랑 내 사랑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암놈 등에 업힌 숫메뚜기의 겹눈 속에 아롱진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박넝쿨에 살포시 앉아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을 흉내낸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나도 메뚜기가 되어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29』(조선일보 연재, 2008)
오탁번 시인 / 쥐에 관한 명상
민박집 천장에서 쥐 달리는 소리 들리면 참말 오랜만에 동갑내기 만난 것 같다
쥐불놀이 하다가 눈썹 태우고 시래기죽 먹고 잠든 겨울밤 쥐불연기에 수염을 그슬린 쥐들이 눈썹 태운 나와 더 놀고 싶다는 듯 쥐오줌자국 난 천장을 밤새 달렸다 씨옥수수 갉아먹던 새앙쥐들도 이불 속까지 기어 들어와 내 어린 발가락을 자꾸 깨물었다 고드름이 제 무게에 툭툭 떨어지는 아침이 밝아 오면 내 꿈길까지 따라오며 보채던 쥐들은 일곱 문 반 내 고무신에 봉숭아씨처럼 예쁜 쥐똥만 남겨 놓고 숨어 버렸다
쥐 달리는 민박집 천장 아래 누우면 옛 동갑내기의 발자국소리 들린다
오탁번 시인 / 눈물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었던 나이가 그러한 맹랑한 자유가 흔하디흔한 눈물만일 줄 알았다 쓸데없는 배설인 줄만 알았다
어젯밤 사랑하는 여자와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도 울 수 없었을 때 툭툭털며 그냥저냥 일어섰을 때 눈물이 숨기고 있던 크나큰 자유를 순수를 알았다
울고 싶을 때 울 수 없는 나이가 되면서 이 시대의 밤은 높기만 했다
죄를 짓고도 죄인 줄 모르는 개똥같은 지성을 미워했다
눈물을 기구하며 개처럼 하루 한낮을 기어다녔다
오탁번 시인 / 죽음에 관하여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갈아주면서 따뜻한 손으로 내 팔뚝을 만지자 바지 속에서 문득 일어서는 뿌리 나는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다
다시 태어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말끔히 하고 환자복 바지를 새로 달라고 했다 .바다 하나 주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했다 .바다 하나요 바지바지 말해도 바다바다가 되었다
오탁번 시인 / 엄마
엄마는 아빠하고 안방에서 자고 나는 동생하고 내 방에서 잔다
동생이 자다 깨어 칭얼거려서 엄마를 불러도 대답이 없다
엄마 아빠는 무얼 하고 있을까 우는 동생 내가 달래 재운다
아침이 되면 아빠가 싱긋싱긋 웃는다 -엄마가 동생공장공장장인 걸 몰라.
오탁번 시인 / 사랑하고 싶은 날
앵두나무 꽃그늘에서 벌떼들이 닝닝 날면 앵두가 다람다람 열리고 앞산의 다래나무가 호랑나비 날개짓에 꽃술을 털면 아기 다래가 앙글앙글 웃는다
태초 후 45억 년쯤 지난 어느 날 다랑논에서 올벼가 익어갈 때 청개구리의 젖은 눈알과 알밴 메뚜기의 볼때기에 저녁노을 간지럽다 된장독에 쉬 슬어놓고 앞다리 싹싹 비벼대는 파리도 거미줄 쳐놓고 한나절 그냥 기다리는 굴뚝빛 왕거미도 다 사랑하고 싶은 날
오탁번 시인 / 여기쯤에서
여기쯤에서 그만 작별을 하자 눈 뜨고 사는 이에게는 생애의 벼랑은 언제나 있는 법 거기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 하나 따서 가슴에 달고 뜻 없는 목숨 하나 따서 만났던 그 자리 그 어둠 앞에 우리의 죄로 젖어 있는 추억을 심고 그만 여기쯤에서 작별을 하자 똑같은 항아리가 어느 한쪽에 깨어져서 들어가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도 아니다 우리의 입술은 아침저녁 비가 오고 내 몸에 묻어있는 눈썹 하나 머리칼 한 올이 나의 새벽까지 따라와서 죄를 짓자고 속삭인다 해도 너의 찬 손이 뜨거워지고 나의 안경이 흐려진다 해도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작별을 하자 그만 여기쯤에서 생애의 벼랑에서 뛰어내려 젖은 입술을 입술에 부비며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오탁번 시인 / 우화(羽化)의 꿈
대나무를 기르는 사람이 영 대쪽같지 않고 난을 기르는 사람이 난커녕 잡초 되어 살아가는 한 많은 한세상 나의 삶이 끝나면
불랙홀 근처 조선 소나무 가지 위에 나는 매미나 한 마리 되어 맴맴맴 우주가 떠나가도록 우러는 보고 싶다
오탁번 시인 / 낙향(落鄕)을 위하여
까마득하게 흐려져버린 내 사랑의 호적등본만한 빈터가 실은 내 생애의 전부였음을 이제야 알겠다 술지게미 먹고 깨금발로 뛰어놀던 내 사랑의 빈터에 말 안해도 마음 다 알아줄 아주 예쁜 사람이 살고 있음을 이제야 알겠다 지에밥에 누룩 풀어 담근 술항아리에서 상강날 해거름쯤 술이 익으면 첫서리 내린 들창문 반쯤 열어놓고 마주 앉아 잔 비우고 싶은 내 마음의 노른자위가 될 아주 예쁜 사람을 전생의 꿈을 꾸듯 찾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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