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시인 / 땅의 폭동
봄이 되어 아무리 깊이갈이를 해도 땅이 그 전처럼 말을 안 듣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땅의 형편을 살피지 않고 우격다짐으로 소출을 늘여보겠다고 비료와 농약을 지난해보다도 더 많이 퍼붓는다
지렁이도 땅강아지도 온갖 미생물도 모조리 사라지고 빈 농약병들만 을씨년스럽게 굴러다니는 땅은 숨을 쉴 수가 없다 땅은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 그들의 유린과 무계획과 마구잡이에도 지쳤다 땅은 이대로 죽기가 싫다 방법은 단 하나 욕망과 우둔에 정면으로 맞서는 길뿐
땅이 펼치는 무서운 폭동의 조짐에도 여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저 인간들에게 오염과 굶주림의 미래가 오리라 그들에겐 더 이상 풍성한 가을이 없으리라
이동순 시인 / 아름다운 순간
내가 창가에 다가서면 나무는 초록의 무성한 팔을 들어 짙은 그늘을 드리워준다
내가 우거진 그늘 답답해하면 나무는 가지 틈새 열어 찬란한 금빛 햇살 눈이 부시도록 보여준다
나무는 잠시도 가만있질 않고 바람과 일렁일렁 무슨 말 주고받는데 이럴 때 잎들은 자기도 좀 보아달라고 아기처럼 보채며 손짓하고 다람쥐는 가지 사이 통통 뛰고
방금 식사 마친 깃털이 붉은 새들은 나무 등걸에 부리 정하게 닦고 세상에서 처음 듣는 어여쁜 소리를 내고 있다
이동순 시인 / 싸라기풀*
논이나 물가 축축한 곳이면 어김없이 돋아나는 풀 싸라기처럼 작은 씨앗 맺어도 거친 바람에 시달려 우수수 우수수 다 떨어지는 풀
논길 오가는 마소의 발굽에 걷어차여 어이없이 허리 부러지는 애달픈 풀 지나치는 수레에 밟혀 온몸에 피멍 든 서러운 풀 만리 밖으로 어이없이 쓸려가 갈피 못 잡고 헤매는 풀
고향도 부모도 잃고 낯선 땅 찬 자리에 떠도는 풀 그 누구도 애틋한 눈길로 보는 이도 없고 거두는 이도 없고 두 볼에 눈물 자국 그대로 어룽더룽 남은 풀
모국어 아주 잊어버린 채 타향도 고향으로 여기고 그럭저럭 이 악물고 살아가는 풀 바람에 허리 꺾여도 다시 일어서는 아, 시련의 풀 또다른 이름 방동사니로도 불리는 중앙아시아 싸라기풀
* 1937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슬픈 처지를 ‘바람에 허리 꺾인 싸라기풀’에 빗대어 탄식했다고 한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의섭 시인 / 결로 무렵 외 3편 (0) | 2021.10.04 |
---|---|
이승하 시인 / 돌아오지 않는 새들을 기다리며 외 5편 (0) | 2021.10.04 |
이문재 시인 / 농담 외 5편 (0) | 2021.10.03 |
정숙자 시인 / 누빔점s (0) | 2021.10.03 |
김선우 시인 / 낙화, 첫사랑 외 2편 (0) | 2021.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