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 / 돌아오지 않는 새들을 기다리며
지금은 볼 수 없는 그 많은 물떼새들 왕눈물떼새, 검은가슴물떼새, 꼬리물떼새, 댕기물떼새...... 수염 돋은 개개비란 새도 있었네 물떼새 알을 쥐고 돌아오던 어린 날의 낙동강 내 오늘 한마리 물고기처럼 回遊해 왔네 아무것도 없네 그날의 기억을 소생시켜주는 것이라고는 나루터 사라진 강변에는 커다란 굴뚝이 도열, 천천히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네, 천천히 대지를 버린 내 영혼이 천천히 황폐해 가듯
이승하 시인 / 아내 닮은 로봇을 기다리며
기호로 이루어진 아내 닮은 로봇 지아지아*를 나는 기다리고 있다 저녁 밥상 차려놓고 인간아내가 나를 밤 깊도록 기다렸듯이
울고 웃고 화도 내는 아이보**야 반인반마의 센토***야 영화 <스타워즈>의 R2D2, C3PO야 기호를 인식하려고 하지 말고 너희들도 기호를 만들어보렴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날에는 단군이 나라를 세우셨으나 인간은 이제 인간형 로봇 휴머노이드****와 힘을 합쳐 기호의 왕국을 세우고 있다
기호로 이루어진 아내 닮은 로봇 지아지아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느라 바쁘다 그 옛날 인간아내가 나를 밤 깊도록 기다렸듯이 나는 지금 아내 닮은 로봇을 기다리고 있고
* 지아지아(Jia Jia):중국 과학기술대학의 첸 샤오핑과 그의 동료들이 3년에 걸쳐 개발한 인공지능 로봇. ** 아이보(AIBO):일본 소니가 개발한 강아지 로봇의 이름. *** 센토(Centaur):KIST가 1994년부터 5년 동안 15명의 박사와 70여 명의 연구원을 참여시켜 만든 로봇의 이름. **** 휴머노이드(Humanoid):인간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 로봇.
이승하 시인 / 강한 걸로 넣어주세요!
남자는 밤에 강해야 한다고? 남자가 밤에 강하지 않으면?
빨간색 스포츠카에 비스듬히 앉은 그대는 <원초적 본능>에 나온 샤론 스톤 남자의 본능을 자극하기 위해 나를 쏘아보고 있다
휘발유의 본능을 깨운다! 엔진파워가 강해지는 휘발유―이맥스 오래도록 쌩쌩하게 지켜줘 나 한화에너지의 모델이 됐지
뭐야? 아직도 운전을 못 배웠다고? 당신 남자야? 여자 운전할 줄 모르면 저리 가! 나, 엄청 비싼 차야
나, 차야 몸값이 비싸지 차량 홍수의 거리를 걸어갈 때 인적 드문 거리를 내달릴 때 근원적인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지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인 느낌 최신형에 최고가, 최고의 상품 인간으로 치면 최고의 스타 나를 향한 부러운 눈길을 자주 느껴
나, 차야 몸체가 견고하지 쇠파이프만큼이나 강한 범퍼 나와 충돌하면 뼈도 못 추릴 걸 위로 눈 치켜뜬 헤드라이트 도도한 내 눈길에 꼬리 내리는 싸구려 차들 난 언제나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 내 표정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아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나, 차야 으리번쩍하지 내 몸매가 잘빠졌다고들 해 관능적인 곡선, 풍만한 자태 여체의 굴곡을 잘 아는 이가 나를 디자인했어 나올 곳 나오고 들어갈 곳 들어가 있는 내 몸은 보험에 들어 있어 가장 좋은 보험에 다치면 안 되지 치료비가 비싸니까
나, 차야 강철인간이야 내 눈앞에서 너희들 까불지 말아 깝죽대지 말란 말야 기분 나빠도 너를 들이받지는 않겠지만 가만히 있는 나를 건드리면 후회할 일이 생길 거야 나 초고온의 불에도 달궈졌었어 밀림의 고무나무로 만든 내 신발값을 너희가 알아?
나, 차야 조용히 살고 싶어 시커먼 방귀를 뀌는 놈 영 시끄럽게 구는 놈들처럼 나 방정맞지 않아 멋진 세상을 나 다만 내 마음이 내킬 때 달릴 뿐이야 이어폰 귀에 꽂고 강변도로를 달리는 저 잘빠진 인간친구처럼 말이야
이승하 시인 / 징글벨 징글벨 징글 올 더 웨이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는 서울 거리 백화점마다 영롱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눈을 반짝이며 때로는 눈 흘기며 날 보러 와요 날 보러 와요 불빛 춤을 춘다 징글벨 징글벨 징글 올 더 웨이 캐럴송까지 기호가 되는 러시아워의 거리
저 트리들이 저 대형 전광판이 종일 저렇게 빛을 뿌리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까 원자력발전소 앞바다는 더 따뜻해졌겠군 핸들을 잡고 아무리 기다려도 앞차는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은 10초마다 바뀌는 전광판의 기호記號 기호를 보여주는 저 거대한 화면
살아생전에는 아예 팔리지 않은 고흐의 그림도 모딜리아니의 그림도 이중섭의 소 그림도 박수근의 자매 그림도 지금은 기호記號다 값으로 자리매김 되는 거대한 건축물들과 진귀한 예술품들 독자의 기호嗜好를 몰라서 절판된 책의 마모된 영혼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와 루돌프 사슴 코 메리 크리스마스! 축 성탄! 그리스도조차도 기호가 되는 날이니 성탄 전야의 바겐세일 내 영혼…… 팔린들 반값이겠다 팔리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이승하 시인 / 나는 투자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저 기호에 투자할 가치가 있을까 이 기호는 나에게 돈을 가져다줄까 셈하는 동안 주식은 곤두박질치고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때로 이 땅을 떠나고 싶지만 대박을 향한 꿈이 발목을 잡는다
A는 말한다 “사람에 투자하지 말고 사물에게 투자하십시오.” B는 말한다 “형태에 투사하지 말고 기호에게 투자하십시오.” C는 말한다 “이 지상에 투자하지 말고 예수님께 투자하십시오.”
세 사람 말이 다 일리가 있지만 돈이 없으면 투자는 물론이거니와 배팅할 수 없다 모험을 할 수 없다 ―인생 대역전 기막힌 찬스가 왔을 때
이승하 시인 / 도로 표지판을 보다
돌아서 가시오 돌아서 간다 이리로 가면 안 됩니다 그리로 가지 않는다 지구를 덮은 기호 기호들 바퀴벌레 같은 기호 코로나19 바이러스 같은 기호 내 앞에 덜컹 나타나고 내 뒤에 죽어라 하고 따라붙는다 은총을 베풀고 복음을 전한다
기호가 나에게 설교한다 나는 믿는다 지상 어디에나 선지자의 목소리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는 하지 마시오 쇠로 만들어진 얼굴 위에 페인트로 분장하고 나선 기호 기호들 기호의 왕국에서 나는 꿈을 버린다
이런 꿈을 꾸라고 명령하는 팻말들 표지판들 상업광고들 나는 늘 기호가 가리키는 대로 간다 마음 놓고 가다가도 멈추라고 할 때는 반드시 멈춘다 돌아서 가시오 돌아가지 마시오 어딜 가시오? 당신 돌았소? 거길 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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