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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희연 시인 / 청귤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4.

안희연 시인 / 청귤

 

 

오늘 당신은

청귤의 모습으로 오는군요

 

설익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제법 달다고

그 푸르뎅뎅함이 바로 나라고

 

청귤은 내게 일렁이는 무늬로 말하네요

당신은 나를 제단 위에 올릴 수도 있고

구둣발로 짓이길 수도 있지만

나는 어디서든 떳떳하고 공평하다고

 

나에게서 지옥을 본다면 그건 당신의 지옥이라고

물이면 물, 불이면 불이라는 표정을 짓는군요

흰 천으로 잠시 덮어두었습니다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새에게 다가가려는 걸음이 새를 쫓는 걸음이 되기도 하기에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창밖을 보려면 창문에 비친 나부터 보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놓여 있는 모양 그대로

바라보기

조각내지 않기

 

보여줘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기

 

흰 천을 걷자 청귤이 있습니다

오늘 당신은 내게 사랑의 모습으로 오는군요

 

청귤을 보는데 심장에 화살을 꽂고 걸어오는 맹수가 보여요

어린 나를 물고 한발 한발 오고 있어요

구해달라는 말인 것 같아요

 

월간 『현대시』, 2021년 2월호

 

 


 

안희연(安姬燕) 시인

1986년 경기도 성남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2012년 《창작과비평》 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