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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동옥 시인 / 가장 불쌍한 나라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4.

신동옥 시인 / 가장 불쌍한 나라

 

 

피곤하고 슬퍼 보여 그게 당신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지

당신은 늘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그림

빛을 많이 받는 쪽부터 서서히 바래고

잊혀가며 주목받는

 

한 개의 목소리를 빚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독백이 필요했을까마는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것만 같았겠지

가벼운 미소로 마음을 다잡고 나날을 배반하는 사랑을 적어나갔다

 

화염으로 빚은 악마와 손아귀로 움켜쥔 천사

이를테면 나날의 저주와 사랑

당신이 지은 세상 어딘가에는 대열에서 이탈한 소년병이 있어

풀잎과 진흙으로 얼굴을 위장하고 제 무덤 귀퉁이를 뚫고 들어가 잠잔다

 

사랑하는 이들과 사랑받아 마땅한 이들과 버림받은 이들보다

당신이 만든 사랑이라는 말이

더욱 소중했겠지 도둑과 사기꾼이 당신이 지은 세계를 지켜왔다

초인종은 고장난 지 오래인데 여전히 시끄럽게 울어대지

 

참 이상하고 외로운 짐승이다

저마다 제가 쌓아올린 성채를 지키는 왕들

내가 죽느냐 내가 사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그런 자신의 고통이

고통을 노래하는 것이 사랑의 죽음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다

 

밤사이 하늘을 가르고 별이 지나간 자리마다

당신이 그린 태양이 떠오른다

마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듯 하지만 별은 돈다

저 하얗게 빛나는 꼬리는 돌가루에 불과해

 

부드럽게 최전하며 제 몫으로 주어진 빛을 반사하는

반사하며 북극성 큰곰자리를 가리키는

별은 돌 때만 길을 보여준다

빈 하늘을 하염없이 돌면서 길을 비추는

돌가루의 문장이 새로운 지도를 만든다

 

계간 『문학동네』, 2021년 봄호

 

 


 

신동옥 시인

1977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한양대 국문학과 졸업. 2001년 《시와 반시》신인상 공모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랜덤하우스, 2008)가 있음. 현재 인스턴트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