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시인 / 청귤
오늘 당신은 청귤의 모습으로 오는군요
설익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제법 달다고 그 푸르뎅뎅함이 바로 나라고
청귤은 내게 일렁이는 무늬로 말하네요 당신은 나를 제단 위에 올릴 수도 있고 구둣발로 짓이길 수도 있지만 나는 어디서든 떳떳하고 공평하다고
나에게서 지옥을 본다면 그건 당신의 지옥이라고 물이면 물, 불이면 불이라는 표정을 짓는군요 흰 천으로 잠시 덮어두었습니다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새에게 다가가려는 걸음이 새를 쫓는 걸음이 되기도 하기에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창밖을 보려면 창문에 비친 나부터 보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놓여 있는 모양 그대로 바라보기 조각내지 않기
보여줘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기
흰 천을 걷자 청귤이 있습니다 오늘 당신은 내게 사랑의 모습으로 오는군요
청귤을 보는데 심장에 화살을 꽂고 걸어오는 맹수가 보여요 어린 나를 물고 한발 한발 오고 있어요 구해달라는 말인 것 같아요
월간 『현대시』, 2021년 2월호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동옥 시인 / 가장 불쌍한 나라 (0) | 2021.10.04 |
---|---|
김진경 시인 / 지구의 시간 외 1편 (0) | 2021.10.04 |
윤의섭 시인 / 결로 무렵 외 3편 (0) | 2021.10.04 |
이승하 시인 / 돌아오지 않는 새들을 기다리며 외 5편 (0) | 2021.10.04 |
이동순 시인 / 땅의 폭동 외 2편 (0) | 2021.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