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의섭 시인 / 결로 무렵
바람은 바람이기 전에 달빛이었느니
만질 수 없는 것들이 오래 묵으면 저렇게 간절한 이무기 되어 풀잎의 신을 신고 숲의 옷을 입고 유랑한다
참으로 긴 나날을 은밀히 이어온 이주 무수한 바람이 생멸하였으나 뼈 속에서도 모체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달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려본 적 없다
달빛 머금은 이슬이란 그러므로 바람의 마지막 모습이다
먼 행성으로부터의 연착륙 이른 아침의 물컹한 결집 군집 운집 응집 그리움이란 소리 소문 없이 다가서서 가슴에 뭉치는 것 풀잎 끝에 피어난 이슬의 위치가 달빛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벼랑이라는 생각은 내가 궁극의 그리움으로 벼랑 끝을 향해 치달리고 있다는 생각과 무엇이 다를까 달빛과 바람과 이슬의 잠행처럼 얼마나 내밀해야 하는 걸까
월력을 마감한 늙은 달의 내음 가끔 비치던 금성의 내음 아침노을의 내음 스산한 구름 내음 어느 이국의 거리를 떠돌던 낙엽 내음 출근길 행인의 머리칼 내음 따스한 눈빛의 내음 상냥한 인사의 내음 침묵의 내음 무심히 사라지는 내음 어딘가에 숨어있다 홀연히 나타나는 내음 전날 전전날 그전전날 맡아보았던 내음 결로 무렵엔 문득 떠오르지 않는가 달이 생겨나던 날의 비릿한 내음까지
이슬은 이슬이기 전에 숨이었느니 잊혔었거나 한 번쯤 죽었다 살아나 간신히 피맺힌
- 『시산맥』2012년 봄호
윤의섭 시인 / 협연
별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달은 혼자 노래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건 노을을 타고 흐르는 바람의 플롯과 나무들의 피아노 연주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
혼자서는 뭔가 부족했다는 거 독주로는 비인간을 넘어설 수 없다는 거
혈점을 짚듯 가로등이 켜진다 저렇게 몰두하지 않으면 저녁은 완성되지 않는다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의 묵언수행과 온종일 불 켜진 편의점의 고행에는 신의 가호가 스며있다
그런 거다 혼자가 아니고 싶으면 완벽하게 혼자여야 한다 별은 별로 달은 달로 바람과 나무 사이를 넘나들며 제 갈 길을 운행해야 한다 이 지구에선 쉽게 고독할 수 없다 인간은 좀 더 떨어져 있어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으며 이별은 얼마나 가까운 간극이었단 말인가
그러니 나와 취향이 같으면 좋겠어 그건 함께 고독해지는 일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마시고 산책길 나무는 꼭 고개 들어 올려보고 절판된 책과 담배와 듣지도 않는 레코드를 수집하고 달력에는 절대 메모하지 않고 그건 서로 쓸쓸해지는 일
저녁의 교향곡을 같이 듣는 일 듣다가 차례가 되면 너를 연주하고 너는 나를 지휘하는 일
윤의섭 시인 / 신비성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를 부르므로 순간 내가 아는 세상의 모든 음악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뒤섞인 음률의 총체성이란 폭음을 넘어 고요에 가깝다 그러니 조용히
따사로운 햇살보다 조용히 침전 중이라고 여겨줘 이제 마지막 남은 인류인 것처럼 흥얼거리는 노래는 어떻게 사라지는가 별들은 울면서 태어났을 것이다 별을 바라보면 잊혀간 노래가 들리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심장을 향해 침전하는 노래
영원에 대한 만가라고 하자 이 서글픈 애도의 또 다른 이름은 질식
가을날의 가로수는 질주하고 또한 메말라갈 뿐이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절규를 매달고 있으므로 미안하지만 신비롭다 고 여길게 그러니까 행복하지는 않다는 거 신비는 다가서면 달아나 버리니까 멀리 바라만 봐야 하는
신기루에 대해 오래된 이야기들은 결말을 맺지 않지 사막을 떠다닌다는 호수가 나오는 대목에서는 지상의 것이 아닌 음악이 들려오지 그런
노래를 부르므로 나는 이 지구에서라면 언젠가는 끝내야 하는 삶과 사랑과 노래의 친연성을 믿기로 한다 그러니 신비하게 처음 보는 일식보다 신비하게 사라지는 중이라고 말해줄게 노래가 어떻게 끝날지도 끝내는 알 수 없겠지
윤의섭 시인 / 감염(感染)
이건 몸에 쓰이는 후기 혹은 가장 오래 이어진 필사여서 아프기 전에 이미 아픔의 절정을 알고 마는 참어 같은 증세로 저녁의 구름은 노을을 옮겨 적는다 꽃내음은 바람을 적시고 바람은 멀리 한 계절을 끌고 간다 그러니까 나는 네게 복제된 증상이다 비접촉으로도 너의 고통과 결합하는 방식 물들기 쉬운 내력을 앓고 있었으므로 너는 다시 내가 불러낸 처음 어느 살점 속에 말없이 뿌리 내리다 떠나가는 유목은 흔적을 남기지 않지 치명적이더라도 내게만 머물기 바라는 난치의 기억 내게서 자라나다 내 안에서 죽어야 하는 너라는 병 전이의 경로를 따라가 보면 달처럼 맴돌았다는 진단이 나올 것이다 한때 월식이 있었고 해독하기 힘든 천문이 새겨졌을 것이다 온몸으로 퍼지는 불온한 증여를 들여다 본다 여기에 어떤 병명을 갖다 붙여도 가령 빗방울에 스민 구름 냄새라든가 단풍나무가 머금은 햇볕의 온기라든가 어쩌면 네게서 너무 멀어져 알아내기 힘들지라도 나는 지금 징후와 후유증 사이의 중간계를 통과하는 중이다 나는 아프기도 전에 감동했다는 것이며 물들었으므로 닮아가야만 하는 의례를 따라 그리하여 면역이라는 영역에 들어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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