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경 시인 / 지구의 시간
날이 밝아 몇 신가 보려는데 시계가 죽었다. 해가 떴으니 시간이 꽤 되었으려니 배추밭에 나가본다. 며칠 전부터 칡을 먹으러 내려온 산토끼들이 어린 호박잎을 밟고 밭에 들어가 애기배추를 갉아먹는다. 드문드문 갉아먹힌 애기배추의 그루터기가 아이들 얼굴에 난 생채기 같아 속이 상한다. 올가미를 놓아버릴까? 어린 호박잎들이 밟혀 찢겨진 자리에 서서 배추밭을 건너다본다. 이곳이 칡밭에서 배추밭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모양이다. 아니, 앞발을 들고 일어서서 괜찮을까 코를 벌름거려 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망을 보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여러 마리가 그러는지 어린 호박 줄기가 온통 뭉그러져 있다. 해가 꽤 높이 솟아 가게에 토끼 퇴치법을 물어보러 가기로 한다. 초등학교 아이들을 태운 통학버스가 길가에 서 있다. 벌써 점심때가 되었나? 학교에 다녀오는 길이냐고 물었더니 가겟집 아이가 이제 학교에 가는 길이라 한다. 나는 아침밥을 먹는 가겟집 식구들 곁에 앉아 다른 별의 시간으로부터 갑자기 나타난 외계인처럼 하릴없이 아침 뉴스를 본다. 그곳에선 전쟁을 외치는 어느 나라 대통령의 연설과 어둠을 찢는 폭격이 시작되고 있다.
애기배추를 갉는 토끼와 갉아먹힌 애기배추 그루터기에 속이 상하는 나와 통학버스와 이 아침밥의 시간들과 그 위에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을 퍼부을 수 있는 시간들과 ……
김진경 시인 / 지상에 내리는 눈 망각은 또 다른 죽음의 시작이다
1 ――― 나무들은 집시처럼 마음에 드는 주소를 정하고 덕수궁 돌담과 하늘 사이 푸른 머리칼을 날린다. 저 나무들처럼 예의바른 허무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엇이 되는 것을 기피한다. 나를 지상에 못 박고 있는 슬픈 육체여, 지상에 발붙일 최소한의 주소만 있다면 파란 하늘가에 머리칼을 날리는 나무들처럼 아무 목적 없는 무상의 것에 취하다 떠나리라 ―――
시청 앞 지하도 입구에 서서 나는 문득 젊은날의 시구절을 떠올리다. 눈이 많이 내린다. 지하도 입구에서 조선호텔까지 조선호텔 너머 인왕산까지 폭설의 주먹만한 눈이 하늘이 무너져내린 듯 쏟아져 세상을 덮고 시야를 뿌옇게 가린다. 이런 날 나무들은 자기가 못 박힌 지상을 응시하며 묵상에 잠겨 있다. 하늘이 무너져 지상에 내렸기 때문일까.
2 언제부턴가 이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은. 눈사람처럼 머리에 하얗게 눈을 얹은 사람들이 머리와 어깨에 얹힌 눈을 털며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선다. "돌담이었지 아마 ?" 노교수는 이제 이방인이 된 나를 돌아보며 희미한 기억의 연결끈을 찾는다. 80년 초여름이었는데 왜 그날 폭설이 내렸던 것처럼 기억되는 걸까. 늦은 저녁 와이셔츠 속에서 유인물을 꺼내 공중전화통에 얹으려고 하고 있었다. 누군가 덥석 손을 잡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청계천을 헤매며 구했던 등사기와 눈물을 흘리며 가리방을 긁던 사람들의 얼굴이 빠르게 스치고 이게 끝인가 ? 눈 속으로 주먹만한 폭설의 눈이 내렸다. "죽으려고 그러냐 ?" 노교수의 걱정스러운 눈. 돌담이었던가 ? 술을 마셨던가 ?
3 이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70년대 말의 어느 겨울 광주 황금동 돈도 없이 우리는 술을 마셨다. 누가 술값대신 인질로 잡힐 것인가를 놓고 화투를 쳤다. 절망이 우리들 사이에 스멀스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주먹만한 눈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고 술 따르기에도 노래에도 지친 작부는 아랫도리를 허술하게 드러낸 채 졸고 있었다. 술을 가운데 둔 인질극 ? 이것도 절망의 한 방식일까 ? 나는 오줌을 털어내면서 생각했다. 주먹만한 눈이 하염없이 쏟아져내리고 라디오에서 폭설에 장성 갈재가 막혔다고 갈재는 그만두고 황금동의 골목들도 막혀 있었다. 사람들이 무릎까지 빠지며 골목을 지나갔다. 고립된다는 건 절망을 참 아름답게 만드는군 ! 나는 생각했다. 화투는 끝나 있었다. 먹구름에 덮힌 황금동의 새벽은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밤처럼 어둡고 흰 눈에 반사되는 불빛은 아름다웠다. 무릎까지 빠지며 걷다가 벌거벗은 나무 앞에 우리는 멈추었다. 나무는 하늘이 온통 쏟아져 덮인 지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묵상에 잠겨 있었다. 고립된다는 건 절망을 참 아름답게 만드는군 !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지상으로의 귀의처럼 떨어져내렸다. 눈물이 한두 방울 우리가 오래도록 머리에 이고 있었던 눈처럼 지상에 쌓인 눈 위로 떨어져내렸다. "언젠가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눈이 내릴 거야. 지상의 모든 것들은 눈에 덮일 거야. 모든 길은 끊어지고 거기서 너는 네가 못 박힌 지상의 한 생을 바라보아야 할 거야."
4 80년 초여름 누군가 구석의 등나무 아래에서 속삭였다. "장성 갈재가 막혔어. " 드디어 큰 눈이 내렸구나 ! 나는 생각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 주먹만한 폭설의 눈이 매서운 바람에 쓸려가는 소리가 전화통의 먼 저편에서 아득하게 들려왔다. 눈은 참 오래도록 내렸다. 예감처럼 느껴졌던 큰 눈은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 ? 눈은 장성 갈재를 넘어 내가 서 있는 교실의 침묵 속으로도 하염없이 쏟아져내려 책상과 아이들과 칠판이 눈 속에 파묻혔다. 눈에 파묻혀 우리는 등사기를 밀었다. "큰 눈이 내리고 있어 ! 지상의 모든 것은 눈에 파묻히고 모든 길은 끊어질 거야. 거기서 너는 지상에 못 박힌 너의 한 생을 바라보아야해 !"
5 눈은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신문로로 오는 사이에 머리칼 위에 눈이 수북이 쌓인다. 겨울 까마귀떼가 저편 하늘의 끝에서 이편 하늘의 끝까지 까맣게 떼지어 날아가고 있다.
망월동 묘지에서 담양 벌판의 끝을 향해 우리는 걸었다.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벌판을 그 여자는 줄곧 따라왔다. 돌아보면 그 여자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까마귀떼가 날아올라 벌판의 끝 집들이 어두워가는 하늘로 피워올리는 저녁 연기를 향해 날아간다. "아이를 낳고 싶어요." "그래, 이제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자유롭게 너를 이야기 하겠지. 기다려. 우리는 아니야. 우리는 예의바른 허무주의자일 뿐이지. 아니면 눈이 내리는 동안 자기가 못 박힌 지상을 응시하며 묵상하는 나무일 뿐인지도 몰라." 까마귀떼는 우리 앞에 내려앉았다. 까만빛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걸까. 흰 눈은 그 여자가 벗어놓은 하얀 삼베의 옷이었다. "아이를 낳고 싶어요." 우리는 울었다. "우리는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생의 한 변방일 뿐이야. 너는 생의 한가운데로 가야만 해 우리는 아니야. "
6 "돌담에 갈까 ? 아직도 있는지도 몰라 ?" 노교수의 권유를 뿌리치고 눈길을 걸었다. 서울은 눈에 파묻혀 흰 벌판이 되고 까마귀떼가 벌판의 끝을 향해 날아간다. 그 여자는 한사코 내 뒤를 따라오고 있다. 까마귀가 내가 걷는 길 앞에 내려앉는다. 까만빛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걸까 ? 그 여자가 벗은 흰 수의가 온 세상을 아름답게 덮는다. "아이를 낳고 싶어요 버려진 생의 한 변방에서. 나를 판 자들은 모두 생의 한 가운데로 떠났어요. 무엇을 더 기다려야 하나요. 말구유는 어디 있어요. 지상에 못 박힐 한 아이를 낳고 싶어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지상에 못 박히지 않나요 ?" 나는 내가 못 박힌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내 머리 위에 쌓인 한 생의 눈이 지상으로의 영원한 귀의처럼 떨어져 내렸다.
(김진경 시집,『별빛 속에서 잠자다』, 창작과비평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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