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림 시인 / 웅덩이 속의 무지개
나는 똑똑히 보았다 대지의 조그만 거울 더러운 검은 웅덩이 속에 영롱한 무지개가 피는 것을
황톳길, 자갈길, 아스팔트 길, 뚫어진 세상의 길이란 길 모두 헐레벌떡 누비고 누비다가 앙상한 시체 되어 내팽개쳐진 자동차 무덤 가까이 온갖 썩어 가는 물과 기름들 모여 있는 아롱아롱 빛나는 화엄의 늪 그 웅덩이 거울 속에 어느 날엔 구름이 쉬어 가기도 하고 어느 날엔 달이 마실 오기도 하고 어느 날엔 배고픈 개들이 컹컹 짖어 대다 사라지기도 하고 어느 날엔 주홍빛 유곽의 불빛들 무릉의 복사꽃으로 피었다 지기도 하는 것을 때때로 나는 보았다
아아, 나는 똑똑히 보았다 대지의 조그만 거울 더러운 검은 웅덩이 속에 영롱한 무지개가 피는 것을
이가림 시인 / 李三晩의 겨울
마침내 세번째 벼루가 바닥났다 남몰래 쏟아놓은 무명베 자락에 적셔진 衙前아전의 울음 시퍼런 가슴 속에는 호남평야보다 너른 고요를 데불고 남의 집 채마밭에 물이나 주며 지나온 이 뼈시린 俯伏부복, 천하다는 沈女심녀의 碑비나 써주며 하늘에 뿌리박기 시작한 야윈 풍란 두어 촉 벗삼아 늘 얼어서 지내는 나날 시커멓게 엉기는 슬픔의 응어리가 마른 붓끝에 피가 되어 묻어 나온다 냉수 마시는 切食절식의 외로움 그 無垢무구한 폐허 위에 벼 베어진 자리인 듯 한점 그루터기만 남는다
이가림 시인 / 바람개비 별 4 - 마음의 귀
바람구두를 신고 굴렁쇠를 굴리는 사나이 늘 마음의 귀 쏠리는 곳 그 우체국 앞 플라타너스 아래로 달려가노라면, 무심코 성냥 한 개비 불붙이고 있노라면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마중 나오듯 그렇게 그대의 신발 끄는 소리……
저 포산(包山) 남쪽에 사는 관기(觀機)가 불현듯 도성(道成)을 보고 싶어 하면 그 간절함 바람으로 불어 가 산등성이 떡갈나무들 북쪽으로 휘이고 도성 또한 관기를 보고 싶어 하면
그 기다림 바람으로 불어 가 산등성이 상수리나무들이 남쪽으로 휘이는 것 옛적에 벌써 우리 서로 보았는가
내가 보내는 세찬 기별에 그대 사는 집의 처마 끝이나 그 여린 창문이 마구 흔들리는 뜨거운 연통관(連通管)이 분명 뚫려 있어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달려가는 내 눈먼 굴렁쇠여!
이가림 시인 / 붉은 악보
오늘은 7월 14일 불란서 혁명기념일 담장의 장미꽃들이 오선지 위의 붉은 음표처럼 피의 폭죽을 펑, 펑, 터뜨리고 있다 저 불순한 것들이 어정쩡히 살아온 나를 박렬(朴烈) 같은 젊은 아나키스트로 잘못 본 것일까 오늘밤만은 장렬한 불꽃축제에 주저 없이 가담하여 함께 폭죽을 쏘아 올리자고 자꾸만 손짓한다.
이가림 시인 / 잊혀질 권리
어린 날 물수제비뜨기의 가뭇없이 가라앉은 조약돌인 듯 후미진 마을의 오두막 홀로 조는 등잔불인 듯 캄캄한 밤 으악새 우거진 골에 떨어진 한 조각 운석인 듯 모래 이불 밑에 몰래 숨은 한 마리 모래무치인 듯 촉촉한 흙에 반쯤 묻힌 보리씨인 듯 나 그렇게 없어진 있음으로 조용히 지워지고 싶어
이가림 시인 / 장독대
어머니의 손때로만 반들거리는 옹기 검은 숯덩이에서도 저리 결 고운 빛이 나오다니 어머니 짜디짠 생애가 절고 절어 하얗게 피는 염화(鹽花) 열일곱 어린 나이로 낯선 부엌 들어서서 캄캄하게 울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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