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광규 시인 / 서울 꿩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4.

김광규 시인 / 서울 꿩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한 모퉁이에

섬처럼 외롭게 남겨진

개발제한 구역

홍제동 뒷산에는

꿩들이 산다

 

가을날 아침이면

장끼가 우짖고

까투리는 저마다

꿩병아리를 데리러

언덕길

쓰레기터에 내려와

콩나물대가리나 멸치꽁다리를

주워먹는다.

 

지하철 공사로 혼잡한

아스팔트길을 건너

바로 맞은쪽

인왕산이나

안산으로

날아갈 수 없어

이 삭막한 돌산에

갇혀 버린 꿩들은

서울 시민들처럼

갑갑하게

시내에서 산다.

 

 


 

 

김광규 시인 / 밤꽃 향기

 

 

술잔처럼 오목하거나

접시처럼 동그랗지 않고

양물처럼 길쭉한 꼴로

밤낮없이 허옇게 뿜어내는

밤꽃 향기

쓰러진 초가집 감돌면서

떠난 이들의 그리움 풍겨줍니다

대를 물려 이 집에 살아온

참새들

깨어진 물동이에 내려앉아

고인 빗물에 목을 축이고

멀리서 고속철도 교각을 세우는

크레인과 쇠기둥 박는 소리에 놀라

추녀 끝으로 포르르 날아오릅니다

참새들이 맡을 수 있을까요

아까운 밤꽃 향기

 

시집 - 처음 만나던 때(문학과지성사)

 

 


 

 

김광규 시인 / 좀팽이처럼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2006년 2월호, <젊은 시인들의 중견 시인 읽기>

 

 


 

 

김광규 시인 / 대장간의 유혹

 

 

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김광규 시인 /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네가 벌써 자동차를 갖게 되었으니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도 하다

운전을 배울 때는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을

네가 대견스러웠다

면허증은 무엇이나 따두는 것이

좋다고 나도 여러 번 말했었지

이제 너는 차를 몰고 달려가는구나

철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를 보지 못하고

길가의 과일 장수나 생선 장수를 보지 못하고

아픈 애기를 업고 뛰어가는 여인을 보지 못하고

교통 순경과 신호등을 살피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구나

너의 눈은 빨라지고

너의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앞으로 기름값이 또 오르고

매연이 눈앞을 가려도

너는 차를 두고

걸어다니려 하지 않을 테지

걷거나 뛰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남들이 보내는 젊은 나이를 너는

시속 60km 이상으로 지나가고 있구나

네가 차를 몰고 달려가는 것을 보면

너무 가볍게 멀어져 가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김광규 시인

1941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 및 同 대학원 졸업.1975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하여 데뷔. 1983 <귄터 아이히 연구> 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저서로는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크낙산의 마음』, 『좀팽이처럼』, 『물길』,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하루 또 하루』 등 10권의 시집과 『대장간의 유혹』,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누군가를 위하여』 등. 『오늘의 작가상, 녹원 문학상, 김수영 문학상, 편운 문학상, 대산 문학상, 이산 문학상, 시와 시학 작품상 수상과  2006년도 독일 언어문학 예술원의 프리드리히 군돌프상과 2008년도 이미륵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