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시인 / 산성눈 내리네
산성눈 내린다 12월 썩은 구름들 아래 병실 밖의 아이들은 놀다 간다 성가의 후렴들이 지워지고 산성눈 하얗게 온 세상 덮고 있다 하마터면 아름답다고 말할 뻔했다 캄캄하고 고요하다
그러고 보면 땅이나 하늘 자연은 결코 참을성이 있는 게 아니다 산성눈 한 뼘이나 쌓인다 폭설이다 당분간은 두절이다 우뚝한 굴뚝, 은색의 바퀴들에 그렇다, 무서운 이 시대의 속도에 치여 몸과 마음의 서까래 몇 개의 소리없이 내려앉는다 쓰러져 숨쉬다 보면 실핏줄 속으로 모래 같은 것들 가득 고인다 산성눈 펑펑 내린다 자연은 인간에 대한 기다림을 아예 갖고 있지 않다 펄펄 사람의 죄악이 내린다 하늘은 저렇게 무너지는 것이다
이문재 시인 / 농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이문재 시인 / 봄날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아예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아래에서 찰칵 옆에서 찰칵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찰칵찰칵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 부아앙 철가방이 정문 쪽으로 튀어나간다.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이다.
―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
이문재 시인 / 어떤 경우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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