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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문재 시인 / 농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3.

이문재 시인 / 농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시집『이 시를 가슴에 품는다』(2006, 랜덤하우스중앙)

 

 


 

 

이문재 시인 / 남쪽

 

 

남쪽에

아는 사람이 있는 사람이

바라보는 남쪽하고

남쪽에

아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바라보는 남쪽은

얼마나 다른가

 

- <혼자의 넓이>(이문재, 창비, 2021, p.25)

 

 


 

 

이문재 시인 / 지금 여기가 맨 앞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이문재 시인 / 밖에 더 많다

 

 

내 안에도 많지만

바깥에도 많다.

 

현금보다 카드가 더 많은 지갑도 나다.

삼 년 전 포스터가 들어 있는 가죽 가방도 나다.

이사할 때 테이프로 봉해둔 책상 맨 아래 서랍

패스트푸드가 썩고 있는 냉장고 속도 다 나다.

바깥에 내가 더 많다.

 

내가 먹는 것은 벌써부터 나였다.

내가 믿어온 것도 나였고

내가 결코 믿을 수 없다고 했던 것도 나였다.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안데스 소금호수

바이칼 마른 풀로 된 섬

샹그릴라를 에돌아가는 차마고도도 나다.

먼 곳에 내가 더 많다.

 

그때 힘이 없어

용서를 빌지 못한 그 사람도 아직 나다.

 

그때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 못한 그 사람도 여전히 나다.

돌에 새기지 못해 잊어버린

그 많은 은혜도 다 나다.

 

아직도 내가 낯설어하는 내가 더 있다.

 

 


 

 

이문재 시인 / 사막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이문재 시인 / 어떤 경우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이문재 시인

1959년 경기 김포시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1982년 <시운동> 4집에  '우리 살던 옛집 지붕'으로 등단. 시집<내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88년) <산책시편>(94년) <마음의 오지>(99년) <제국호텔>(2004년). 김달진문학상(95년) 소월시문학상(2002년), 지훈문학상(2005년),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2014)>.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현.시사저널 편집위원. 계간<문학동네>편집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