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시인 / 농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시집『이 시를 가슴에 품는다』(2006, 랜덤하우스중앙)
이문재 시인 / 남쪽
남쪽에 아는 사람이 있는 사람이 바라보는 남쪽하고 남쪽에 아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바라보는 남쪽은 얼마나 다른가
- <혼자의 넓이>(이문재, 창비, 2021, p.25)
이문재 시인 / 지금 여기가 맨 앞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이문재 시인 / 밖에 더 많다
내 안에도 많지만 바깥에도 많다.
현금보다 카드가 더 많은 지갑도 나다. 삼 년 전 포스터가 들어 있는 가죽 가방도 나다. 이사할 때 테이프로 봉해둔 책상 맨 아래 서랍 패스트푸드가 썩고 있는 냉장고 속도 다 나다. 바깥에 내가 더 많다.
내가 먹는 것은 벌써부터 나였다. 내가 믿어온 것도 나였고 내가 결코 믿을 수 없다고 했던 것도 나였다.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안데스 소금호수 바이칼 마른 풀로 된 섬 샹그릴라를 에돌아가는 차마고도도 나다. 먼 곳에 내가 더 많다.
그때 힘이 없어 용서를 빌지 못한 그 사람도 아직 나다.
그때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 못한 그 사람도 여전히 나다. 돌에 새기지 못해 잊어버린 그 많은 은혜도 다 나다.
아직도 내가 낯설어하는 내가 더 있다.
이문재 시인 / 사막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이문재 시인 / 어떤 경우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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