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시인 / 낙화, 첫사랑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2007)
김선우 시인 / 양변기 위에서
어릴 적 어머니 따라 파밭에 갔다가 모락모락 똥 한무더기 밭둑에 누곤 하였는데 어머니 부드러운 애기호박잎으로 밑끔을 닦아주곤 하셨는데 똥무더기 옆에 엉겅퀴꽃 곱다랗게 흔들릴 때면 나는 좀 부끄러웠을라나 따끈하고 몰랑한 그것 한나절 햇살 아래 시남히 식어갈 때쯤 어머니 머릿수건에서도 노릿노릿한 냄새가 풍겼을라나 야아―― 망 좀 보그라 호박넌출 아래 슬며시 보이던 어머니 엉덩이는 차암 기분을 은근하게도 하였는데 돌아오는 길 알맞게 마른 내 똥 한무더기 밭고랑에 던지며 늬들 것은 다아 거름이어야 하실 땐 어땠을라나 나는 좀 으쓱하기도 했을라나
양변기 위에 걸터앉아 모락모락 김나던 그 똥 한무더기 생각하는 저녁, 오늘 내가 먹은 건 도대체 거름이 되질 않고
김선우 시인 / 거미
새벽잠 들려는데 이마가 간질거려 사박사박 소금밭 디디듯 익숙한 느낌 더듬어보니, 그다
무거운 나를 이고 살아주는 천자의 어디쯤에 보이지 않는 실끈의 뿌리를 심은 걸까
나의 어디쯤에 발 딛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은 魂처럼 가볍고 가벼움이 나를 흔들어 아득한 태풍이 시작되곤 하였다
내 이마를 건너가는 가여운 사랑아 오늘 밤 기꺼이 너에게 묶인다
―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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