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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선우 시인 / 낙화, 첫사랑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3.

김선우 시인 / 낙화, 첫사랑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2007)

 

 


 

 

김선우 시인 / 양변기 위에서

 

 

어릴 적 어머니 따라 파밭에 갔다가 모락모락 똥 한무더기 밭둑에 누곤 하였는데 어머니 부드러운 애기호박잎으로 밑끔을 닦아주곤 하셨는데 똥무더기 옆에 엉겅퀴꽃 곱다랗게 흔들릴 때면 나는 좀 부끄러웠을라나 따끈하고 몰랑한 그것 한나절 햇살 아래 시남히 식어갈 때쯤 어머니 머릿수건에서도 노릿노릿한 냄새가 풍겼을라나 야아―― 망 좀 보그라 호박넌출 아래 슬며시 보이던 어머니 엉덩이는 차암 기분을 은근하게도 하였는데 돌아오는 길 알맞게 마른 내 똥 한무더기 밭고랑에 던지며 늬들 것은 다아 거름이어야 하실 땐 어땠을라나 나는 좀 으쓱하기도 했을라나

 

양변기 위에 걸터앉아 모락모락 김나던 그 똥 한무더기 생각하는 저녁, 오늘 내가 먹은 건 도대체 거름이 되질 않고

 

 


 

 

김선우 시인 / 거미

 

 

새벽잠 들려는데 이마가 간질거려

사박사박 소금밭 디디듯 익숙한 느낌

더듬어보니, 그다

 

무거운 나를 이고 살아주는

천자의 어디쯤에

보이지 않는 실끈의 뿌리를 심은 걸까

 

나의 어디쯤에 발 딛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은 魂처럼 가볍고

가벼움이 나를 흔들어

아득한 태풍이 시작되곤 하였다

 

내 이마를 건너가는 가여운 사랑아

오늘 밤 기꺼이 너에게 묶인다

 

―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 2007)

 

 


 

김선우 시인

1970년 강릉에서 출생.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와 산문집『물 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의 사물들』 등과 그 밖의 저서로 전래동화『바리공주』와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가 있음. 2004년 ‘현대문학상, 2007년 제9회  '천상병시상' 과 이육사문학상 그리고 2008년 한국여성문예원 선정 제1회  '올해의 작가상'과 제1회 시인광장 시문학상 수상. 현재 〈시힘〉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