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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끝별 시인 / 세상의 등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3.

정끝별 시인 / 세상의 등뼈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시집『와락』(창비, 2008)

 

 


 

 

정끝별 시인 / 펭귄 연인

 

 

팔이 없어 껴안을 수 없어

다리가 짧아 도망갈 수도 없어

 

배도 입술도 너무 불러

너에게 깃들 수도 없어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껴안고 서 있는

여름 펭귄 한 쌍

 

밀어내며 끌어안은 채

오랜 세월 그렇게

 

서로를 녹이며

서로가 녹아내리며

 

 


 

정끝별 시인

1964년 전라남도 나주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석, 박사학위. 1988년 '문학사상' 신인 발굴 시 부문에 <칼레의 바다,> 외 6편이 당선. 1994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서늘한 패러디스트의 절망과 모색>으로 당선되어, 시작 활동과 평론 활동을 병행.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시론, 평론집으로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시해설집 『시가 말을 걸어요』 『행복』 『밥』, 산문집 『여운』 『그리운 건 언제나 문득 온다』 . <유심작품상>과 2008년도 <소월시문학상>을 수상. 현재,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