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시인 / 모기 선(禪)에 빠지다
죽비(竹扉) 열대야다 바람 한 점 들어올 창문도 없이 오후 내내 달궈놓은 옥탑방 허리를 잔뜩 구부러트리는 낮은 천장 아래 속옷이 후줄근하게 젖어 졸다 찰싹, 정신을 차린다 축축 늘어져가는 정신에 얼음송곳처럼 따끔 침을 놓고 간 모기
불립문자(不立文字) 지난 밤 읽다 만 책장을 펼쳐보니 모기 한 마리 납작하게 눌려 죽어있다 이 뭣꼬, 후 불어냈지만 책장에 착 달라붙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체액을 터트려서 활자와 활자 사이에 박혀 있는 모기, 너도 문자에 눈이 멀었더냐 책장이 덮이는 줄도 모르고 용맹정진 문자에 눈 먼 자의 최후를 그렇게 몸소 보여주는 것이냐 책속의 활자들이 이 뭣꼬, 모기 눈을 뜨고 앵앵거린다.
향(香) 꼬리부터 머리까지 무엇이 되고 싶으냐 짙푸른 독을 품고 치잉칭 또아리튼 몸을 토막토막 아침이면 떨어져 누운 모기와 함께 쓰레받기 속에 재가 되어 쓸려나가는 배암의 허물은산철벽(銀山鐵壁) 찬바람이 불면서 기력이 다했는가 날쌘 몸놀림이 슬로우모션으로 잔바람 한 줄에도 휘청거린다 싶더니, 조금 성가시다 싶으면 그 울음소은산철벽(銀山鐵壁)
찬바람이 불면서 기력이 다했는가 날쌘 몸놀림이 슬로우모션으로 잔바람 한 줄에도 휘청거린다 싶더니, 조금 성가시다 싶으면 그 울음소리 엄지와 집게만을 가지고도 능히 꺼트릴 수 있다 싶더니, 갈수록 희미해져가는 울음소리, 사라진 그쯤에서 잊고 살던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려온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 간간이 앓아 누우신 아버지의 밭은기침 소리도 계단을 타고 올라온다 저 많은 소리들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니
손택수 시인 / 돌종
돌 쪼는 소리 쩡 쩡 여름 한낮 나른한 대기를 흔든다 뭘 만드느냐 물으니 석수장이, 돌종을 만든단다 큰절 부방장 스님 석종 부도를 만든단다 그러고 보니 돌은 반쯤 종신 모양을 하고 있다 저 돌종이 다 완성되면 종은 이제 다시는 울지 못하는 버버리 종이 되겠구나 그래, 버버리 종으로 굳어지기 전에 석수장이 내려치는 정 끝에서 저렇게 얼얼하게 아파 실컷 울고 있는 모양이구나 울음 뚝 그친 돌 속으로 들어가서 어떤 중이 돌종이 될는지 엉덩이 묵직한 돌종으로 깊디깊은 참선에 빠져들는지 돌은 벌써 반쯤 문 딱 걸어잠근 침묵이다 챙 챙 불꽃 튀기는 침묵으로 남은 울음을 마저 쪼아내고 있다
손택수 시인 / 낡은 자전거가 있는 바다
외갓집 소금창고 구석진 자리에 낡은 자전거 한대가 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녹이슬었지만, 수리하면 쓸 만하겠는걸. 아마도 나는 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쌩쌩 미끄러져 다녔을 은륜의 눈부신 전성기를 생각했는지 모른다. 논둑길 밭둑길로 새참을 나르고 포플러 푸른 방둑길 따라 바다에 이르던 시절, 그는 아마도 내 이모들의 풋풋한 젊은 날을 빠짐없이 지켜보았으리라. 읍내 영화관 앞에서 빵집 앞에서 참을성 있게 주인을 기다리다, 아카시아 향기 어지러운 방둑길로 푸르릉 푸르릉 바큇살마다 파도를 끼고 굴러다니기도 했을, 어쩌면 그는 열아홉 꽃된 처녀아이를 태우고 두근두근 내 아버지가 될 청년을 만나러 가기도 했으리라. 바다가 보이는 풀밭에 누워 클레멘타인 클레멘타인, 썰물져가는 하모니카 소리에 하염없이 젖어들기도 하였으리라. 그때 풀밭과 바다는 잘 구분이 되질 않아, 멀리서 보면 그는 마치 바다에 누워 즐겨 꿈에 젖는 행복한 몽상가로 보이지 않았을까. 첫사랑처럼 한 번 익히고 나면 여간해선 잘 잊혀지질 않는 자전거, 손잡이 위의 거울 먼지를 닦아본다. 거울은 오래 전부터 그렇게 나를 품고 있었다는 눈치다. 턱없이 높은 앉을깨 위에서 페달이 발에 잘 닿지 않는다고 툭하면 투정을 부리던 철부지 아이를, 맥빠진 앞바퀴 뒷바퀴 타이어에 바람 빵빵 밤 늦도록 소금자루 같은 달을 태우고 비틀대던 방둑길을.
손택수 시인 / 하늘 우물
성당 종탑 위에 종을 매다는 건 하늘에 우물이 있기 때문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우물을 파고 우물 속에 띄워 놓는 쇠두레박
꼰벤뚜알 꼰벤뚜알 성프란치코 수도회 종지기가 종줄을 당기면 두레박이 수면에 부딪힐 때 찰랑, 하는 소리가 들리지
저 높은 곳에 바닥 모를 깊이로 파 내려간 우물이 있었다니 허나 끌어올려도, 끌어올려도 찰랑찰랑 흘러넘치는 물소리만 내는 쇠두레박
그 아래 내가 한참을 멈춰 서 있는 건, 내 두 귀가 잠시 목 마른 물지게통이 되기 때문
손택수 시인 / 가시잎은 시들지 않는다
하늘에 매가 없다 솔개 한 마리, 독수리 한 마리 없다 이게 새들을 절망케한다 매서운 부리와 발톱에 쫓길 때 그는 차라리 그 죽을 지경 속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겨울 아침 새들이 눈 쌓인 탱자나무 울타리 속에 와서 운다 아무런 장애물 없이 펼쳐진 저 드넓은 하늘을 두고 결사코, 여린 가슴을 겨누는 가시 밀림을 찾아든다
오늘 빙벽을 찾아 나선 사내들이 추락사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얼음 속의 가시, 살을 쿡쿡 찔러대는 빙벽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팽팽한 밧줄을 타고 아찔한 빙벽 사이를 날아다녔을 새들
시들지 않기 위해 피어나는 잎이 가시가 된다 연하디 연한 이파리로부터 시퍼 렇게 담금질한 무쇠잎이 된다 이파리 투둑 떨어지고 적설량에 와지끈 가지가 꺾어져도 잠들지 마라 잠들지 마라 겨우내 시들지 않고 남아 얼어붙은 땅을 찔러대는 가시
손택수 시인 / 곡비
눈이 많이 내린 한겨울이면 새들에게 모이를 줘서 아들 내외에게 자주 잔소리를 듣던 함평쌀집 할머니
세상 버리던 날 새들은 오지 않았다 밥 달라고, 밥 달라고,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양철문을 바지런히 쪼아대던 새들
등쌀에 이놈의 장사도 집어치워야겠다, 그 아드님 허구헌 날 술만 푸고 있더니
쌀집 앞 평상마루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들려준다 장지의 소나무 위에서 울던 새울음 소리가 어째 영 낯설지만은 않더라고
울 어매가 주는 마지막 모이를 받으러 왔나 싶어 고수레 고수레 한상 걸게 차려주었더니, 구성진 곡비 소리 해종일 끊이질 않더라고
손택수 시인 / 언덕위의 붉은 벽돌집 - 1998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불의 뿌리에 닿고 싶은 하루하루 햇빛이 묻어 놓고 간 온기라도 여직 남아 있다는 듯 눈사람이 되어, 눈사람이 되어 만질 수 있는 희망이란 벽돌 속에 꿈을 수혈하는 일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을
새벽이 오도록 빈 벽돌 속에 시를 점화하며, 수신자 불명의 편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세월, 그 아이는 떠나고 벽돌집도 이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가슴속 노을 한 채 지워지지 않는다 내 구워낸 불들 싸늘히 잠들고 비록 힘없이깨어지곤 하였지만
눈 내리는 황금빛 둥지 속으로 새 한 마리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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