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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성우 시인 /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3.

박성우 시인 /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시집『가뜬한 잠』(창작과비평사. 2007)

 

 


 

 

박성우 시인 / 황홀한 수박

 

 

잘 읽은 수박은 칼끝만 닿아도 쩍,

벌어진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혀끝만 닿아도 쩍,

벌 어 진 다

수박물이 떨어져 젖은 삼각 티슈처럼

붉은 속살에 스민 황홀한 팬티, 입을 쩍,

벌려 혀끝으로 벗겨낸다

 

수박씨처럼 음모를 뱉어내기도 하면서

마른 침만 삼키곤 했던 수음의 사춘기를 서른에 버린다

 

 


 

 

박성우 시인 / 기차

 

 

기차 지나간다

사내가 덜컹거린다, 덜컹

덜컹거리다 제자리에 박히는 별, 무더기별

쏟아지는 그리움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사내가 길다란 악보를 걷는다 멀리

멀어져간 하모니카를 분다

혼자 걷는 어둠속

칸칸이 들어 있는 멜로디는 쓸쓸한 법

기억에서 꺼낸 음표들이

개망초를 흔든다

사내는 기다란 노래처럼 걷는다

기찻길만 긴 것은 아니다

 

 


 

 

박성우 시인 / 자두나무 정류장

 

 

외딴 강마을

자두나무 정류장에

 

비가 와서 내린다

눈이 와서 내린다

달이 와서 내린다

별이 와서 내린다

 

나는 자주자주

자두나무 정류장에 간다

 

비가 와도 가고

눈이 와도 가고

달이 와도 가고

별이 와도 간다

 

덜커덩덜커덩 왔는데

두근두근 바짝바짝 왔는데

암도 안 나와 있으면 서운하니까

 

비가 오면 비 마중

눈이 오면 눈 마중

달이 오면 달 마중

별이 오면 별 마중 간다

 

온다는 기별도 없이

 

비가 와서 후다닥 내린다

눈이 와서 휘이잉 내린다

찰바당찰바당 달이 와서 내린다

우르르 뭇별이 몰려와서 와르르 깔깔 내린다

 

북적북적한 자두나무 정류장에는

왕왕, 장에 갔다 오는 할매도 허청허청 섞여 내린다

 

 


 

 

박성우 시인 / 배꼽

 

 

살구꽃 자리에는 살구꽃비

자두꽃 자리에는 자두꽃비

복사꽃 자리에는 복사꽃비

아그배꽃 자리에는 아그배꽃비 온다

 

분홍 하양 분홍 하양 하냥다짐 온다

 

살구꽃비는 살구배꼽

자두꽃비는 자두배꼽

복사꽃비는 복숭배꼽

아그배꽃비는 아기배꼽 달고 간다

 

아내랑 아기랑

배꼽마당에 나와 배꼽비 본다

 

꽃비 배꼽 본다

 

 


 

 

박성우 시인 / 말랭이집

 

 

말랭이집 슬레이트 지붕이 빨갛다

말랭이집 돌담 단호박이 빨갛다

말랭이집 마당 끝물 고추가 빨갛다

말랭이집 할매 기침소리 바삭바삭 하얘서

말랭이집 마당가 장두감이 말랑말랑 빨갛다

 

 


 

박성우 시인

1971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 원광대 문예창작과외 同 대학원 박사학위.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거미〉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거미』 『가뜬한 잠』 『자두나무 정류장』, 동시집 『불량 꽃게』, 청소년시집 『난 빨강』 등이 있음. 신동엽문학상, 윤동주젊은작가상 등을 수상.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