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시인 / 남편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11』 (조선일보 연재, 2008)
문정희 시인 / 유방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지는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패잔병처럼 두 팔 들고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 사춘기 때부터 레이스 헝겁 속에 꼭꼭 싸매 놓은 유방 누구에게나 있지만 항상 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듯 깊이 숨겨왔던 유방 우리의 어머니가 이를 통해 지혜와 사랑을 입에 넣어주셨듯이 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 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 오랜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었고 또 아기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 지금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축 늘어진 슬픈 유방을 촬영하며
문정희 시인 / 작가의 사랑
여성 작가 여섯이 한방에 모여 사랑의 경험을 이야기하자고 한 밤 마른 입술을 오므리며 폴란드 시인이 말했어 사랑 이야기라면 당신들은 우선 유대인을 잊어서는 안 돼! 오슈비엥침! 아우슈비츠를 알기 전에 사랑을 말하는 것은 진정한 작가가 아니야 순간 모두는 입을 다물고 말았어 도박판에서 전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새벽처럼 텅 빈 눈으로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어
멀리 두고 온 땅, 조국이라는 말만으로 괜히 눈물이 차올랐어 빌어먹을, 나는 진짜 시인인가 봐!
잘 알아, 하지만 작가가 언제까지 한곳에 못 박혀 있을 수는 없어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인간을 더 깊이 써야 해 그리스 작가인지 터기 작가가 말했어 애절한 근친과 죄와 폭력 들 내 여권 속의 분단과 증오와 노란 리본 들 검고 흰 살과 피 으깨어진 화상의 흔적을 남미와 아프리카와 유럽과 동아시아 작가가 한방에 모여 사랑을 이야기하고자 한 밤 내가 불쑥 말했어 애국심은 팬티와 같아 누구나 입고 있지만 나 팬티 입었다고 소리치지 않아 먼저 팬티를 벗어야 해
우리는 팬티를 벗었어 하지만 나는 끝내 벗지 못한 것 같아 눈만 뜨면 팬티를 들고 흔드는 거리에서 자란 나는 하나를 벗었지만, 그 안에 센티멘털 팬티를 또 겹겹이 입고 있었지
사랑은 참 어려워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문정희 시인 / 늙은 코미디언
코미디를 보다가 와락 운적이 있다 늙은 코미디언이 맨 땅에 드러누워 풍뎅이처럼 버둥거리는 것을 보고 그만 울음을 터뜨린 어린 날이 있었다 사람들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이가 코미디를 보고 운다고 그때 나는 세상에 큰 비밀이 있음을 알았다 웃음과 눈물 사이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어두운 맨 땅을 보았다 그것이 고독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그런 미흡한 말로 표현되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 맨 땅에다 시 같은 것을 쓰기 시작했다 늙은 코미디언처럼 거꾸로 뒤집혀 버둥거리는 풍뎅이처럼
문정희 시인 / 조각달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피 말리는 거역으로 하얗게 뜬 새벽
거짓말처럼 죽은 자들 속으로 당신은 떠나가고
나는 하얀 과거 하나 더 가졌다
당신 묻을 때 내 반쪽도 떼어서 같이 묻었다
검은 하늘에 조각달이 피었다
문정희 시인 / 페로비아의 사내
왜 불러 왜 불러 돌아 서서 가는 사람을 왜 왜 왜 멕시코 중부 페로비아 시장에서 투창처럼 귀에 꽂히는 한국 노래 허공에 세운 기둥을 따라 밧줄을 잡고 돌면 오색 웃음 쏟아지는 미친 해골들 사이 고꾸라진 노루처럼 눈알 속에 허공을 담고 떠돌이 물건을 팔고 있는 한국 사내 오랜만의 모국어에 마치 전갈에게 물린 듯 얼어붙은 입술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 홀로 만든 장편 대하소설, 기승전결 없이 어느 페이지를 넘겨도 폭우와 막다른 길‘ 왜 불러 왜 불러 돌아 서서 가는 사람을 왜 왜 왜 목에 걸려 안 넘어가는 아직도 쇳덩이 같은 뜬구름 한 덩이
문정희 시인 / 물의 시집
사랑시는 물에다 써야 한다 출렁임으로 다만 출렁임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위험한 거미줄에 걸린 고통과 쾌락의 악보 사랑시 한 줄의 이슬 방울들 저녁 물거품이 상륙하기 전의 꿈같은 신방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면 이윽고 썰물을 따라 가뭇없이 사라지는 물거품의 가락으로
사랑시는 물에다 써야 한다 물에서 태어나고 사라지는 물의 시집이어야 한다
문정희 시인 / 거짓말
가령 강남 어디쯤의 한 술집에서 옛사랑을 다시 만나 사뭇 떨리는 음성으로 "그동안 너를 잊은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참말일까 그 말이 곧 거짓임을 둘 다 알아차리지만 그 또한 사실은 아니어서 안개 속에 술잔을 부딪칠 때 살아온 날들은 거짓말처럼 참말처럼 사라지고 가령 떠내려가 버린 그 많은 말들의 파도를 그 덧없음을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때 우리는 누구일까 시인일까
문정희 시인 / 시인의 장례식 ―패스티시기법으로
죽음은 시인을 지배하자 못한다; 딜란 토마스
시인의 장례식은 없다 시인이 죽고 난 후 시인의 시가 사라질 때 그때 시인은 죽는다고 한다 시인은 장례식 없이 광활한 망각 속으로 사라지거나 책 속에 살아있다 시인의 장례식은 시간이 치른다 시인은 사랑하고 분노하고 노래할 뿐이다 어떤 시인은 영속(永續)에 대한 갈망으로 서둘러 시비를 세우고 기념관을 짓지만 그런 시인일수록 안타깝게도 목숨이 죽자마자 죽는다 시인의 장례식은 없다 아니 장례식을 한 후에도 영롱하게 천년을 살고 있지 않은가
―『문학청춘』(2021, 봄)
문정희 시인 / 결혼 기차
어떤 여행도 종점이 있지만 이 여행에는 종점이 없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전에 한 사람이 기차에서 내려야 할 때는 묶인 발목 중에 한쪽을 자르고 내려야 한다
오. 결혼은 중요해 그러나 인생이 더 중요해 결혼이 인생을 흔든다면 나는 결혼을 버리겠어
묶인 다리 한쪽을 자르고 단호하게 뛰어내린 사람도 이내 한쪽 다리로 서서 기차에 두고 온 발목 하나가 서늘히 제 몸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서둘러 다음 기차를 또 타기도 한다
때때로 차창 밖을 내다보며 그만 이번 역에서 내릴까 말까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선반에 올려놓은 무거운 짐을 쳐다보다가 어느덧 노을 속을 무슨 장엄한 터널처럼 통과하는
종점이 없어 가장 편안한 이 기차에 승객은 좀체 줄어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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