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시인 / 방심(放心)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 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격월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5, 11/12)
손택수 시인 / 아홉 귀에 들다 - 구이구산에서
구이라 아홉 귀 이름에 솔깃해서 찾아간 집 전주까지 가서 주인 대신 맞은 그 가을은 처마 끝으로 오는 저녁이 이마를 짚어주는 손만 같았는데 숙박비 대신 홍시나 좀 따놓고 가 먼저 왔던 성우는 이발사를 해도 잘할 거야 숙박비 대신 풀들을 말끔하게 다 깎아놓았지 뭔가 슬쩍 흘리고 간 얘기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고 장대를 야무지게 쥐고 가지를 비틀어보다가 자코메티의 조각상같이 군살 하나 없는 영혼의 성우를 내가 어떻게 당한단 말인지 한나절 씨름에 지쳐 뻑뻑한 목을 돌리다 보면 뚜두둑 굽은 목이 펴진 것 같았다 맨날 노트북만 들여다보고 사느라 굽은 목 장대처럼 펴보라는 뜻이었나 하늘 좀 보고 살라는 숙제였나 구이라 마을도 아홉 산도 아홉 밤이면 귓속에 처마등을 내걸고 투닥투닥 감 떨어지는 소리를 약으로 듣던 집 해마다 가을이면 마저 끝내고 싶을 것 같다 하다 만 숙제, 자꾸 질투가 나는, 이발사를 해도 잘할 거라는 그 선한 성우를 생각하며,
장대 끝을 새부리처럼 벌리고서
손택수 시인 / 방어진 해녀
방어진 몽돌밭에 앉아 술안주로 멍게를 청했더니 파도가 어루만진 몽돌처럼 둥실둥실한 아낙 하나 바다를 향해 손나팔을 분다 (멍기 있나, 멍기-) 한여름 원두막에서 참외밭을 향해 소리라도 치듯 갯내음 물씬한 사투리가 휘둥그래진 시선을 끌고 물능선을 넘어가는데 저렇게 소리만 치면 멍게가 스스로 알아듣고 찾아오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하마터면 정신나간 여잔가 했더니 파도소리 그저 심드렁 갈매기 울음도 다만 무덤덤 그 사투리 저 혼자 자맥질하다 잠잠해진 바다 속에서 무엇인가 불쑥 솟구쳐 올랐다 하아, 하아- 파도를 끌고 손 흔들며 숨차게 헤엄쳐나오는 해녀, 내 놀란 눈엔 글쎄 물 속에서 방금 나온 그 해녀 실팍한 엉덩이며 볼록한 가슴이 갓 따 올린 멍게로 보이더니 아니 멍기로만 보이더니 한 잔 술에 미친 척 나도 문득 즉석에서 멍기 있나, 멍기- 수평선 너머를 향해 가슴에 멍이 든 이름 하나 소리쳐 불러보고 싶었다
손택수 시인 / 추석달
스무살 무렵 나 안마시술소에서 일할 때, 현관보이로 어서옵쇼, 손님들 구두닦이로 밥먹고 살 때
맹인 안마사들도 아가씨들도 다 비번을 내서 고향에 가고, 그날은 나와 새로 온 김양 누나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나 시켜 먹자, 그렇게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그 말이 무슨 화근이 되었던가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렇게나 많았던지, 상한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퉤, 퉤 신세한탄을 하며 구두를 닦는 동안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 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추석달
손택수 시인 / 감나무의 수사학
꽃이 피었다, 도시가 나무에게 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다 이 도시의 이주민이 된 뒤부터 속마음을 곧이 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살아있자, 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 속마음을 감추는 대신 비트는 법을 익히게 된 서른 몇 이후부터 나무는 나의 스승 그가 견딜 수 없는 건 꽃향기 따라 나비와 벌이 붕붕거린다는 것, 내성이 생긴 이파리를 벌레들이 변함없이 아삭아삭 뜯어먹는다는 것 도로가 시끄러운 가로등 곁에서 허구한날 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 참을 수 없다 나무는, 알고 보면 치욕으로 푸르다
손택수 시인 / 풀벌레 울음소리
그 여자는 무릎 부근이 성감대였다 무릎 아래 종아리나 그 위를 쓰다듬어 주면 금세 상기된 얼굴이 되곤 하였다 둘만의 은밀한 시간 거기에 살짝 손끝이라도 대고 간질여주면 진저리를 치며, 내가 깜박 넘어가도 좋을 음악소리를 내곤 하였다 풀벌레들 중 몇몇은 다리로 운다는데 다리 관절 어디에 울음통이 있어 가을밤이 자지러지도록 울어주곤 한다는데 그 여자는 아무래도 풀벌레들의 후예인가보았다 그래, 풀벌레들 가늘디가는 다리를 물려받았나보았다 살면서 어디에 무릎 꿇을 일 그리 많았던지 구두코가 다 벗겨지도록 오르내릴 계단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가끔씩 쥐가 나서 주물러주던 다리 장난스레 쓰다듬으면, 끄집어내던 치마 속에 숨어 곱게 눈을 흘기던 그 슬픈 무르팍
손택수 시인 / 집
알껍질은 뜯어먹는다 방금 나온 애벌레가 껍질을 깨고 나오자마자 놀라운 식욕으로, 그동안 나를 품어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너를 품어주마, 뛰쳐나온 집을 하나도 빠짐없이 오물오물 뜯어먹는다
애벌레의 몸속으로 통째로 들어간 집, 애벌레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곰실곰실 기어다니다가 더듬이를 쭉 내밀어보고, 양 날개를 활짝 펴보는 집, 알집속에 수많은 새끼집을 짓고 눈을 감으리라 그렇게 집이 나의 양식이 되고, 나는 집의 처소가 되어 살다 가리라
무얼 잘못 먹었는지 생똥을 싸고 자꾸 헛구역질을 한다 녹화해둔 「환경스페셜」비디오 테이프도 다 돌아가고 차디찬 꽃무늬 장판바닥에 누워 나비잠을 청해보는 하루, 어쩐지 벗어논 허물처럼 집이 헐렁하다
손택수 시인 / 장생포 우체국
지난 밤 바다엔 폭풍주의보가 내렸었다 그 사나운 밤바다에서 등을 밝히고 누구에게 무슨 긴 편지를 썼다는 말인지 배에서 내린 사내가 우체국으로 들어온다 바다와 우체국의 사이는 고작 몇 미터가 될까 말까 사내를 따라 문을 힘껏 밀고 들어오는 갯내음, 고래회유해면 밖의 파도 소리가 부풀어오른 봉투 속에서 두툼하게 만져진다 드센 파도가 아직도 갑판을 때려대고 있다는 듯 봉두난발 흐트러진 저 글씨체, 속절없이 바다의 필체와 문법을 닮아 있다 저 글씨체만 보고도 성난 바다 기운을 점치고 가슴을 조릴 사람이 있겠구나 그러고 보면 바다에서 쓴 편지는 반은 바다가 쓴 편지, 바다의 획순을 그대로 따라간 편지 수평선을 긋듯 반듯하게 접은 편지를 봉투 속에 집어넣고 뭍에 올랐던 파도 소리 성큼성큼 멀어져간다 뿌- 뱃고동 소리에 깜짝 놀란 갈매기 한 마리 우표 속에서 마악 날개를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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