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월 시인 / 해란강에 와서
1. 내 누이들이 숨져간 해란강에 나는 무얼 찾겠다고 서성이고 있는가 강물은 저만큼 뒤 안 돌아보고 흘러갔고 누워서 말없는 저 따뜻한 돌멩이들만 잘 왔노라 반겨주는데 해란강 해란강 목놓아 불러도 누이들은 보이지 않고 올려다 보이는 일송정 너머론 누이들 남색 치마물결로 곱게 물든 하늘만 높네
2. 내 아버지들 숨져간 해란강에 나는 무얼 찾겠다고 뒷짐지고 있는가 세월은 저만큼 뒤 안 돌아보고 스쳐갔고 피어서 고개들어 흔들리는 풀꽃들만 잘 왔노라 반겨주는데 해란강 해란강 소리쳐 불러도 흰옷자락 보이지 않고 올려다 보이는 일송정 너머론 송골매 한 마리 빙빙 돌며 맑게 씻긴 하늘만 높네
서지월 시인 /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색동저고리 날리는 바람이 분다 어느땐들 우리가 한식구 한솥에 밥 아니 먹고 북채 장구채 골라잡지 않았으리요만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꽃 떨어지기 전에 부는 바람 임 보는 바람 꽃 떨어지고 부는 바람 열매 맺는 바람 백두산의 진달래꽃 피어서 꽃구경 가는 날 으스러진 강물이 땅을 울리고 으깨어진 어깨가 춤을 춘다 이 강산 햇빛 나고 구름 좋은 날 구름 위의 새소리 맑게 뚫리는 날 쓰린 발 쓰리지 않고 저린 손 저리지 않고 목마름도 피맺힘도 한풀 꺾인 목숨이라 샘물 퍼내어서 버들잎 띄워 마시고 숨막히는 산고개도 넘어보면 훤한 이마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연지 찍고 분바르고 귀밑머리 날리는 바람이 분다, 소나무 가지 위에.
서지월 시인 / 낙타풀의 노래
나는 너를 낙타풀이라 부른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 비 한 방울 입맞춤 하지 않는 수천년 세월동안 거기 뼈를 묻은 사람들 걸어서 天竺國까지 간 스님들 헤진 발바닥 소리까지 귀 없는 귀로 듣고 가시 돋힌 네 몸뚱아리 사막의 낙타는 피 흘리면서까지 너를 뜯어 먹으며 비단을 실어 날랐지 나는 네가 남아서 지키고 있는 그 길을 실크로드라 부른다 오늘의 내가 그 길따라 비단금침의 꿈 버리지 못하고 벋어가는 것은 낙타풀 네가 있기 때문이다
서지월 시인 / 내 사랑
길을 가다가도 문득 하늘을 보다가도 문득
지금은 안 보이지만 생각나는 사람
이 하늘 아래 꽃잎 접고 우두커니 서 있는 꽃나무처럼
내 생각의 나뭇가지는 서(西)으로 뻗어 해지는 산 능선쯤에 와 있지만
밥을 먹다가도 문득 다른 길로 가다가도 문득
안 보면 그뿐이지만 생각나는 사람
서지월 시인 / 포옹무한(抱擁無限)
살다보면 하늘이 맑게 보여 사랑하는 법 익히고 비오는 날은 배깔고 누워 뒤척이다가 천정보면서 한숨도 쉬지만 우리가 정작 사랑할려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할려면 마음에 쓴 모자를 벗고 편하게 안길 일이다 서로 안아줄 일이다
서지월 시인 / 산다는게 뭐 별것 있는가
산다는게 뭐 별것 있는가 강으로 나와 흐르는 물살 바라보든가, 아니면 모여있는 수많은 돌멩이들 제각기의 모습처럼 놓인 대로 근심걱정 없이 물소리에 귀 씻고 살면 되는 것을
산다는게 뭐 별것 있는가 강 건너 언젠가는 만나도질 사람 그리워 하며 거닐다가 주저앉아 풀꽃으로 피어나면 되는 것을 말은 못해도 몸짓으로 흔들리면 되는 것을
산다는게 뭐 별것 있는가 혼자이면 어떤가 떠나는 물살 앞에 불어오는 바람이 있는 것을 모습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그 모두가 우리의 분신인 것을
산다는게 뭐 별것 있는가 하늘 아래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목숨인 것을
서지월 시인 / 가난한 꽃
금빛 햇살 나려드는 산모롱이에 산모롱이 양지짝 애기풀밭에 꽃구름 흘러서 개울물 흘러서 가난한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나그네가 숨이 차서 보고 가다가 동네 처녀 산보 나와 보고 가다가 가난한 꽃 그대로 지고 맙니다
꽃샘바람 불어오는 산고갯길에 고개 들면 수줍은 각시풀밭에 산바람 불어서 솔바람 불어서 가난한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행상 가는 낮달이 보고 가다가 동네 총각 풀짐 놓고 보고 가다가 가난한 꽃 그대로 지고 맙니다
서지월 시인 / 인생을 묻는 그대에게
부는 바람 탓하지 마라 예비된 몸짓인 것을
지는 꽃 한탄하지 마라 작별의 시간인 것을
앞서 가는 자 부러워 마라 먼저 일어나 걸어가는 것을
높은 나무의 열매 부러워 마라 부귀영화가 매달려 있음이 아닌 것을
서지월 시인 / 윤동주 시인의 생가 저녁노을
가고 없는 날들이 모여 불타고 있는 저 꽃밭 좀 봐! 가만있질 못하고 떠서 흐르는 꽃밭 좀 봐! 식지않은 하늘이 보여주는 뜨거운 심장의 꽃들이 뒤돌아보며 무어라 중얼거리네 죽어 말없는 시인은 하늘에 넋을 묻었나? 저녁이면 찾아와 붉게 타올랐다가 저승길 먼 듯 썰물지는 저것 좀 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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