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 시인 / 호랑이처럼
발톱을간다 숨죽인발톱갈라진발톱난폭한발톱 그리고욕망의발톱 새끼발톱은문드러져겨우형체만남았다
으슥한밤이되면 굶주린호랑이처럼발톱을세우고 아무나잡아먹고싶어진다
어머니는함부로살기를드러내면못쓴다고, 어릴적내야생의발톱에 메니큐어를발라위장을해주셨지만
내속에살고있는짐승한마리 사슬에묶인짐승한마리 사나운짐승한마리
그렇게참고살아서 도대체남은게뭐가있느냐고,
닳고닳은이빨로 발톱깎기를 꽉-물어뜯는다
고영 시인 / 물에 새긴 무늬
열대어 블루 그라스가 죽어 화려한 지느러미가 떠올랐다
물에 새긴 무늬가 어항 속을 물들였다
제 무늬에 빠져 죽은 블루 그라스
머릿속에 새겨진 무늬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고영 시인 / 청포도 과수원
시골 교회당쪽으로 넝쿨이 한 뼘씩 자라나는 과수원, 길게 뻗은 청포도나무를 보고 있었다.
끝도없이 펼쳐진
푸른 문장을 보고 있었다 첨탑사이로 올려다본 하늘은 너무나 푸르렀다. 피뢰침에 걸려 뚝뚝, 여문 종소리가 떨어지고 있었다. 산소방울을 달고 있는 청포도송이마다 어린 햇살들의 傳言이 눈부셨다. 누군가 할렐루야! 하고 부르면 금세 소리가 와르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누구도 섣불리 따먹지 않을 듯한 투명한 유리구슬 태양들. 나는 목책 울타리 밖에서 햇살의 傳言을 듣고만 있었다. 신선한 일요일이었다. 청포도잎사귀가 세상을 푸르게 덮고 있었다.
고영 시인 / 쓸쓸한 위로
사내의 접힌 윗몸을 일으켜 세우자 병상 위에 남아 있던 온기도 따라 일어선다 홑이불 속에 묻어두었던 신음소리가 새어나온다 고통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몸의 친절인가 몸속에서 조금씩 소멸해가는 시간을 자신의 몸으로 확인하는 건 또 얼마나 당혹스러운가 수술실로 실려 가는 저 사내에게 가습기가 길고 긴 숨을 대신 몰아쉰다 복도 의자 위 마른 꽃다발 속에서 파리 한 마리 힘차게 날아오르고 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손등에 얹힌 사내의 눈빛이 아직 따뜻하다 젠장, 수술실 앞에선 남겨진 자가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
고영 시인 / 교감
동백나무 꽃망울 속에 내가 평소 갖고 싶던 방을 들인다 겹겹이 붉은 단열벽도 치고 아무나 침범할 수 없도록 출입문은 딱 한 개, 봄을 향해 단다 아아, 갑갑해, 너무, 갑갑해, 세상 구석구석 다 볼 수 있도록 천장엔 하늘문을 단다 동백꽃숲은 위성 안테나 초고속 인터넷에 접속한다 침침하던 동백꽃망울 속에 환한 생기가 돈다 이 단촐한 방에서 나는 겨울바람과 채팅도 하고 떨어지는 눈(雪)과 몸도 섞는다 좀 더 우주적으로 省察하고 싶어 밤마다 전갈자리별과 사랑도 주고받는다 내가 사랑한 전갈자리별을 동백나무 꽃망울 속 내 붉은 방에 은밀히 초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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