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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미애 시인 / 연필의 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5.

유미애 시인 / 연필의 밤

 

 

그 손에 잡히기 전까지 바다는 내게 없던 말이다

 

나를 깨운 그는 또 다른 상자 속의 사람

아침이면 우리는 연둣빛이 다녀간 종아리를 긁었다

밤새 모서리가 쏟아놓은 얼룩덜룩한 비명들

나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지만

출렁이는 무늬를 감춘 그의 등이 바다의 색일 거라 믿었다

 

나지막해지는 자신이 그는 좋다고 했다

깎이고 부러지는 데는 이력이 났다 했다

나는 매일, 화석이 된 그의 눈물을 캐내어

싱싱한 이파리들을 베꼈다

돛배와 등대를 그리고, 그가 놓친 여우를 기다렸다

 

그림자를 한껏 젖힌 나팔수 뒤로

복사꽃 그늘을 풀어헤치듯 앳된 여자가 웃었다

 

그림이 완성될 때마다 내 시간도 한 겹씩 벗겨졌지만

핏자국 선명해지도록 나를 벗겨냈다

 

마침내, 숲 한 채가 송두리째 뽑혀왔을 때

그믐달처럼 휘어진 그를 배에 실어 보냈다

 

바다의 램프를 끄고 그의 상자에 못질을 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바로 나였다는 걸

일생동안,

발가벗겨진 채로 울고 있었다는 것을

 

계간『애지』 2021년 여름호 발표

 

 


 

 

유미애 시인 / 뿔

 

 

당신의 서사를 끌고 온 건 뿔이다

이것은 엉겅퀴 술 한 잔을 마시고 뿔을 갖게 된 사람의 이야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뿔은 자란다

세상의 길이란 누군가 잘라낸 뿔로 만들어진 것

욕망의 반지름을 알 수 없었던 당신 역시 뿔을 잘라내며

여기 까지 왔을 것이다

 

엉겅퀴의 보라색 언어는 독설이 대부분 이었으므로

당신은 방향 없는 채찍질로 뿔을 몰아가고

벌거벗은 몸의 상처를 꿰매어 다시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겠지만

그런 역사에도 눈꺼풀이 순해지는 저녁과

노랗게 곯은 달을 품고 눈뜨는 장면이 숨어 있으므로

가시가 되기 전의 꽃잎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뿔이 몸을 파고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모든 길들이 신발을 벗어놓는 거기쯤

죽은 나무에 찔레꽃 화관을 걸어놓은 사람도 당신이 아니었을까

 

일각수, 사슴이 살던 이마를 만지는 당신의 흉곽이 깊다

갑옷이었으며 창검이었던 뿔은 지금 낡은 이정표처럼 서 있다

체크남방 꽁지머리의 당신이 이제야 보인다

 

당신의 이름 옆에는 혹처럼 작은 뿔이 잠들어 있다

 

월간 『현대시』 2020년 12월호 발표

 

 


 

유미애 시인

경북 문경에서 출생. 2004년 《시인세계》 신인상 수상작〈고강동의 태양〉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손톱』(문학세계사, 2010)와『분홍 당나귀』(천년의시작, 2019)가 있음. 2019년 풀꽃문학상젊은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