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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혜정 시인 / 막장시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5.

허혜정 시인 / 막장시인

 

 

사십줄이 되도록 세상 바깥에서 방황하던 그가

자기 목소리를 기억하냐고 전화를 걸어왔다

시집 하나 꾸릴 수 있겠냐고

빛바랜 원고뭉치를 내밀고 있었다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그렇게 깊이 파헤쳐진 갱도는 없다

슬픔의 채탄량을 채우는 불굴의 광부처럼

까맣게 무너지는 세월을 보수하며

녹슨 레일을 따라 탄차를 밀던 시간

 

소주에 쩔어가던 그의 청춘을 되새겨본다

시절이 미워 아무 데서나 환장한 사람이 되던 그를

다들 내버린 사람이라던 외로운 사내를

 

눈자위에 먹먹한 어둠이 지는

절망의 막장에서 깡마른 그림자로 버티던 그가

시라고 할 만한 게 있기는 있느냐고

반짝이는 눈물로 묻고 있었다

 

진짜 하늘 진짜 세상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펜 하나로 찍어낸 나락 끝의 말들은

돌멩이에 대항하는 살이다

어둠을 파헤치는 벌레의 희망이다

 

예상치도 않은 금맥이 입 속에서 터진 날

반짝이는 말들은 시베리아 동토층

앙골라의 흙더미에서 튕겨나온 보석같았다

어떤 전자저울로도 정확히 달아낼 수 없는 의미의 무게

 

세상이 하는 일이라곤 가공하고 거래하는 것 뿐

 

(2015년 [포지션] 여름호)

 

 


 

 

허혜정 시인 / 오시리스의 배

 

 

아직 불빛이 남아 있을까 창가에서 살펴보면

마지막 불빛 한 점 눈을 아프게 했다

늦도록 밤을 잊은 그는 누군지

그 어떤 고통의 자욱들을 지웠는지 아는 이는 없다

얼마나 기나긴 시간이 지나갔는가

오늘밤 나의 노트에는 나일강이 흐른다

아름다운 별빛의 강. 내 사랑의 간절한 고통이 올 때

낡아가는 말들로 빛의 관을 짠다

상실은 영원의 밤으로 출발하는 시작이니

아팠던 심장을 항아리에 봉하고

모든 시간의 이야기를 벽화로 새겼다

사랑하는 이여. 이제 그대는 먼지요 기억이요

이 한 줄의 문장보다 아무 것도 아니다

말라가던 말들은 가슴 깊이 그림자로 새겨졌다

아팠던 펜을 내려놓고 침대로 돌아가면

손가락을 더듬는 바람의 창백함

피로한 몸은 한줌의 잠을 목말라 하는데

가느다란 유골처럼 자그락이는 말들

침묵이여 다가와 나를 지우라

잠결에 뒤척이던 근심의 물결마저 잠잠해질 때

망각의 강 추억을 싣고 머나먼 우주를 항해하던 사람들

다시는 철석이는 물소리도 이름도 갈망도 없이

어떤 아픔도 손대지 않은 채 남겨두는 곳

수평선의 빛이여, 나를 축복하소서

나의 사랑은 끝났습니다

 

 


 

 

허혜정 시인 / 유리 부는 사람

 

 

뜨거운 유리액이 필요했을 뿐이다

세상에서 더럽혀지기 쉬운 약간의 숨결이

아직도 기계의 조형을 거부하는 그들은

파이프에 매달린 유리방울에

천천히 숨결을 불어넣었다

 

싸늘한 겨울이 다가오는 시간

땀젖은 기모노의 장인들을 나는 지켜보았다

불꽃에서 녹아나온 유리액이 부풀어오르는 순간

하얗게 굳어진 숨결의 방이 어떻게 식어가는지

예상치도 못한 파편으로 부서져버리는지

 

나는 생각하였네, 저 유리의 방에

영원한 숨결이 머물 수만 있다면

부드러운 종이등을 밝히는 일본여인처럼

자그맣게 앉아있을 수도 있겠지

푸른 숨결 속에 꽃과 사진을 담아

고요히 선반에 올려놓을 수도 있겠지

 

퇴색한 영롱함에 눈이 아릴 때

한때 너무나 가슴을 울리던 말들

누군가 말해주기 전에는 빛나지 않던 말들

어두운 벽 가득 떠오르는 몸짓

이제 어느 곳에도 없는 웃음

휘푸른 슬픔만이 자욱하고

고요히 아사를 꿈꾸고픈 정적

 

 

아득한 슬픔으로 금이 가던 방에서

진실로 사랑한다 나는 말해본 적이 있다

 

 


 

허혜정 시인, 평론가

1966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및 同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7년《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1995년 《현대시》 평론상에 당선, 199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도 당선되어 시인이며 평론가로 활동. 계간 '시와 사상'과  '서정시학'  편집위원으로 활동 中. 2010. 제11회 젊은 평론가상, 동국문학상 수상.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 숭실사이버대학교 방송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