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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규정 시인 / 채석강 스캔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5.

서규정 시인 / 채석강 스캔들

 

 

  책은 옆구리로 읽는 것이다

 

  등뼈 부러지는 소리로 허리를 펴도 펼 소나무는

어기적어기적 한 뿌리는 이미 바다 쪽으로 던진 채석강을

찾아 가리, 길을 잡아주던 길잡이보다 길잡이를 끝낸

곳에서 허리 굽힌 동네 머슴이 되리니

 

  엎드려 일만 하고서도 담배 한 개비면 충분한, 뽐뽐뽐

통통배 연기배 맞춰 해거름에 들어가면 고봉으로 밥상

차려놓고 부엌문 뒤로 살짝 숨은 손, 그 손은 달랑 한 장의

거친 겉장 같지만 더듬어 읽어갈수록 따뜻한 속살의

책을 온밤을 채워 거푸거푸 읽었듯이

 

  나 그렇게 채석강에 가면 옆구리로 읽어낸 한 사람이

억 만권 장서 속에 비릿하게 묻혀 있으리

 

 


 

 

서규정 시인 / 낙화

 

 

만개한 벚꽃 한 송이를 오 분만 바라보다 죽어도

헛것을 산 것은 아니라네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모심이 있었고

 

추억과 미래라는 느낌 사이

어느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는 그 이유 하나로도 너무 가뿐한

 

 


 

 

서규정 시인 / 줄기가 나를 세운다

 

 

꼭 한놈만 죽이고 싶은 가을이 가네

딱 한 번만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게

십자성 별빛따라

한 놈의 흉곽을 확 열어 제끼고

사형수가 되었으면 하네

재판관이 왜 그랬냐 물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장기 기증을 권유하는 덜 떨어진 녀석이

간, 심장, 눈, 그 중에 하나만 빼놓고 가라 하면

쓸개나 떼주고 가리

T.V에 자주 등장하는 인기승려가

지은 죄 씻고 가라 하면

검은 장갑이나 벗어 주고 가리

마지막으로 남길 말 없냐 물으면 고개를 살레살레

 

한없이 열어 본 해바라기 빈 가슴

 

*(직녀에게) *빛남출판사 서규정 시인

 

 


 

서규정 시인

1949년 전북 완주에서 출생. 김제고등학교.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겨울 수선화』 외 3권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