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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성렬 시인 / 아즈텍 증후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5.

이성렬 시인 / 아즈텍 증후군

 

 

  그는 안개 자욱한 아침에 찾아왔다. 멋진 테너를 자랑하는 성악가에게 남모르는 고민이 있었는데 - 사랑스런 여자에게 말을 걸 때 튀어나오는 소름끼치는 음성에, 누구나 질겁하며 달아나기 일쑤라는 것.

 

  살아가는데 별 문제 아니라고 외과 의사는 말했지만, 더 큰 고민은 - 음산한 고백에 이어 목구멍에서 스물스물 기어 나오는, 뱀의 혀를 닮아 끝이 갈라진 붉은 버섯송이였다.

 

  아즈텍 벽화를 깊이 공부한 병리학자의 생각은 달랐다 - 고대 멕시코 사람들의 입에서 굵은 버섯이 튀어나왔는데, 제사장은 뿌리가 없는 버섯 임자의 혀를 뽑아 돼지에게 주었다고.

 

  병원 측의 소견서는 이러했다 - 이 환자의 증상은, 사랑하는 여자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임. 유럽으로부터 도입된 카운터 테너, 가성(假聲)의 바이러스로 간단히 퇴치됨.

 

 


 

 

이성렬 시인 / 누구에게 전화하는지

 

 

  그녀의 얼굴 변천사를 보면 진실은

  바닥없는 구덩이 밑바닥에 있지.

  원래 얼굴이란 원래 없는 것,

  그녀가 돌잔치에서 화장품을 집어 들었다거나

  버는 돈 모두 부모에게 맡긴다거나

  소주 한 잔 마시면 병원에 실려 간다는, 등등

  사실이 아니면 어떤가, 그들에게

  환상을 줄 수 있다면, 가령

  그녀의 허리가 굵어지면 포샵으로 깎으면 되고,

  젖꽃판 내보인 사진을 흘리며

  기자들에게 촌지 좀 쥐어주면

  기관원들에게 꼭지 떼였다는 소문은 사그러들지.

  무리해서 쓰러졌다는 소문을 보내면 그들은

  힘내세요, 사랑해요! 라고 응원하지.

  감각의 제왕,

  무지개를 뿜는 그림자,

  봄꽃 시들면 여름나비로 옮겨가네.

  샘솟는 아이디어를 수첩에 올리고

  달마다 그녀의 치마 뒷춤을 잘라먹으면 되지.

  잠들기 전 냉동실에 입을 넣어두면

  아침까지는 산뜻 멸균된다네.

  중요한 건 결정적 순간

  누구에게 전화 걸 수 있는지!

  부드럽고 질긴 괴벨스,

  세상을 스토킹하네.

 

 


 

 

이성렬 시인 / 그림자 놀이

 

 

  식구들과 여행을 갈 때마다 밤중에 몰래 빠져나와 집으로 전화를 걸곤 했다. 러시안 룰레트에서 힌트를 얻은 이 놀이에 나는 온 귀의 신경을 팽팽히 곤두세우며 집중했지만, 게임의 규칙을 알지 못하여 번번이 실패하였다. 반복적으로 울리는 신호는 민물장어처럼 귓바퀴를 빠져나갔을 뿐.

 

  놀이의 비밀을 알아낸 것은 엉망으로 취한 대명콘도 지하상가에서였다. 신호음이 아니라 밑에 깔린 미세한 잡음이 모르스 부호로 말하고 있음을. 무작위한 전자들의 움직임이 <적어도, 지금, 여기에>라고 속삭임을 분명히 들었고, 철학책을 뒤져가며 해독하는데 8개월이 걸렸다.

 

  두 번째는 쿄토 금각사 근처 여관에서 <캪슐, 즐거움, 말미잘>이라는 단어들이 흘러나왔는데, 1년 반 후에 대전 술집에서 옆에 앉은 미대 아르바이트생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 다음에는 진화론의 대가인 스티븐 굴드 교수의 책에서나 읽은 듯한 <우연히, 直立猿人, 치질, 도도새>라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 은밀한 놀이는 그러나 제주 중문단지에서 송화기 구멍 사이로 내 음산한 목소리가 <출구, 덧없음, 不在>라고 내뱉었을 때, 목덜미에 돋은 소름과 함께 끝이 났다.

 

 


 

 

이성렬 시인 / 프리즘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60년대 아주 추운 날 아침,

  유담뽀를 안은 채 잠이 깬 내 머리맡에 놓인,

  깊고 따뜻한 주머니를 가진,

  질기고 강한 고무줄을 두 겹 넣은,

  내 다리보다 한 뼘이나 더 긴,

  대바늘 사이로 수많은 한숨이 무늬를 새겨 넣은,

  내 가슴 속 깊이 무지개의 화석으로 박힌,

  지금 흐린 겨울 하늘에 갑골문자로 눈물겨운,

  어머니가 뜨개질 부업에서 남긴 색색 털실로 짠,

  총천연색 얼룩말 무늬 스웨터 바지 한 벌

 

 


 

 

이성렬 시인 / 그 모든 나날이 지나도록 나는 아직 미쳐있네

 

 

  벌새는 언제부터 곡선비행을 싫어했을까

  해와 달은 날마다 조울증을 보이기로 결심했을까

  무궤도전차가 푸른 스파크를 일으킬 때마다

  성가대 트럼펫 주자는 반음씩 낮춰 연주했지, 그리고는

  눈이 퉁퉁 부은 새들을 피해 지하병동을 통과하는 지름길로 귀가했네

  검은 안경을 쓴 레고 군대가 티비를 점령했을 때, 동물원에서

  펭귄을 오래 노려보면 가랑이에 품은 알을 계란 대신 건넬지,

  악어가 갑옷을 벗어 코끼리 형상의 여류정치가에게 헌사할지 가늠했네

  너는 영문 크로스워드를 풀고 있었지, 빈 방에서 울며

  <separate &unequal>이란 용어가 그리도 야속했던가, 교수는

  <아웃소싱의 미래>라는 책을 오래 씹어보라고 했지

  시집 표지에 얼굴을 박은 시인은 반드시 파시즘으로 가데

  누구는 세포의 이면마다 화성과 금성의 음모가 보인다고 하던데, 아직도

  침몰한 여객선 캡틴이 정복을 벗고 먼저 구명보트에 올랐다고 생각하는지

  전쟁 대신 치르는 축구경기에서 누가 처진 스트라이커인가 면밀히 관찰하는지

  흑백영화에서 붉은 연기를 굴뚝 위로 피워 올린 최초의 감독이 누군지, 이젠 아는지

  지붕 위에 앉아 누군가 노래 부르네, 그대

  아직도 날 모른다고, 그러나 진실로 미치게 하는 건

  그토록 많은 나날, 너의 집으로 들어가는 그리운 골목과

  나오는 아득한 골목이 같다는 걸 왜 몰랐을까?

 

 


 

이성렬 시인

1955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및 KAIST 졸업.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 수여받음. 2002년 《서정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모아드림, 2003)와 『비밀요원』(서정시학, 2007) 가 있음.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 웹진 『시인광장』 副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