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배선옥 시인 / 회 떠주는 여자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4.

배선옥 시인 / 회 떠주는 여자

 

 

바다와 사람들

그 사이에 여자는 있다

 

날마다 횟감을 흥정하는 소란 속에

선승처럼 고즈넉이 앉아

오늘도 칼질을 한다

 

손을 뻗으면 무엇이든 집을 수 있는

반경 오십센티의 작업장.

파랗게 날을 세운 칼을 집으면

이제 보이는 것은 모두

 

 


 

 

배선옥 시인 / 無

 

 

쓸 데 없는 감상은 손만 다치게 한다

한순간 명줄을 끊어주는 것도 자비

배를 가르고

미처 소화되지 못한 세상을 흩어내

깊숙이 묻힌 진심을 들어내면

곧 또 하나의 역작이

접시에 담겨지리니

 

(2004. 시집 ‘회 떠주는 여자’ 수록)

 

 


 

 

배선옥 시인 / 오래 전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다

 

 

그것은 이미 전설. 소재지를 가늠해 볼 수 없는 아득한 타향. 타클라마칸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지도 속에만 반짝이는 말라버린 우물. 두레박 가득 담겨진 뜨거운 모래를 집어 들고 나도 몰래 한숨을 내쉴 때 혹시, 어깨너머로 들여다 봤니 거기, 모래 두레박 안에서도 두둥실 떠오르던 노오란 낮달. 숫자 뒤에 꽁꽁 숨어 깔깔거리던 술래야. 풀리지 않는 암호처럼 놓쳐버렸던 기억을 더듬어 오래도록 파묻혔던 열쇠를 찾았구나 너에게로 가는 길.

 

(2013. 시집 ‘오래전의 전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다’ 수록)

 

 


 

 

배선옥 시인 / 밥줄

 

 

본의 아니게 남의 밥줄을 끊은 몹쓸 인간이 되었다 혹시나 행여나 말도 아끼고 숨도 함부로 쉬지 못하는 줄타기의 마지막에서였다 대체적으로 우리네들의 일상이라는 것이 내 것인데도 내 맘대로 부리지 못 하는 바,

 

겨우 그런 유치한 핑계거리를 만들어 내 손모가지를 변명하는 것밖엔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따로 또 같이 늦게까지 책상을 지키고 앉았던 것도 왠지 모를 내 마음이 그리 하라 시켰겠지만,

 

환한 공원 불빛 아래서 대낮인 양 공놀이를 즐기는 젊은 사내들을 흘끔거리며 퇴근하던 길 주책도 없이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인적 없는 길을 걸어 전철역에 당도하도록 진하게 훌쩍였던 것인데,

 

아, 밥이 생각나는 거였다 따끈따끈한 밥 한 숟가락 불현듯 내 목구멍이 측은해졌지만 누가 알아볼까 봐 텅 빈 플랫폼이나 서성거렸다

 

 


 

배선옥 시인

1997년 월간 《시문학》 등단. 시집 『회떠주는 여자』, 『오래전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다』, 『오렌지 모텔』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