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용 시인 / B형 독감 -당신의 친절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귀신처럼 앓았다. 그날은 시간도 아니고 날짜도 아니었으며, 켜면 덥고 끄면 추운 까닭에 유독 온풍기가 싫었다. 뜨거운 눈을 만지며 겨울에 꽃이 핌을 알았다.
당신은 왜 내 새벽을 지배합니까? 변명 대신 풀을 깎아 꽃말을 쓰는 당신. 우리는 내내 침묵을 지켜야만 티브이에 얄팍한 사인을 남길 수 있다. 따뜻한 조명 아래, 악어의 눈으로 서로를 본다. 당신의 눈이 사과를 한다.
새벽녘 전구에는 앵무새가 갇혀있다. 가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따뜻한 전구처럼, 앵무새는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 땀을 흘릴 줄 모른다. 빛은 천구에 달린 철사. 철사와 천사가 같은 뜻이 아니나 신의 형상을 띈 인간만이 케이크에 불을 붙인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다면 청결한 짐승이 아니다.* 사랑을 잃을 때마다 눈에 꽃이 핀다. 불결히도 단 한 순간 함께하지 못한 우리가, 서로를 전 애인이라고 표현한 건 어떤 노파심에서였을까? 어찌 됐건 이제 너를 좋은 사람이라 부르지 않을 텐데, 관자놀이에 커피 맛 땀이 고인다.
포교하듯 노래를 부르다. 촛농이 흘러 초를 불다. 전구에 갇힌 앵무새 마지막 깃털을 털다. 새벽에 피아노 소리가 나다. 빛없이 소리가 나다.
하품하듯 티브이를 본다. 티브이의 늙은 사자가 그랬듯 배가 고픈 것은 아니다. 새벽녘 무덤 없이 핀 꽃은, 프리저브드 처리되어 시들지 않는다.
* 레위기. 당신께 바다쯤 사는 또 다른 내게
계간 시산맥 2018 여름호
백승용 시인 / 잠이 없는 금(禽)께
처음 칭찬과 비난을 구분할 무렵
네가 뱀 굴에 산다고 아무도 믿지 않았지. 하지만 작은 구멍 속 네가 보이는걸. 바보 같은 금요일이 지나면 바보 같은 금이 나올지 몰라. 무심코 넘은 선과 상처의 말에, 숨 멈추고 가만히 서서 죽은 땅을 본다. 그 사이로 개미가 계속해서 산을 파고, 너는 먼 미래 빗금이 되어 今今今
바다 반대 방향으로 콧바람을 불어주겠니. 눈 뜨지 못할 만큼 세찬 바람이 불면, 나는 네가 뱀의 껍질을 덮었다며 지레 겁먹을게. 오늘 본 영화가 신작인지 창문을 닫았는지 똑같은 길을 헤매고 있는지, 내 말이 거짓이라며 얼른 입을 막을게. 희게 부시도록 닦아주고 싶던 금
잠을 자지 않는 네게 뱀의 혀로 글을 쓰는 네게
이미 죽은 아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도 모르는 일인걸. 부끄러운 생각이 들면 굴 앞에 모인 사람들을 봐주겠니. 원한다면 모든 이들에게 내 허물을 나눠줄게. 바보 같은 금요일이 지나면 너도 독사의 혀와 뱀의 비늘을 자랑할 수 있게.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꼭 내 얘기처럼 들릴 때. 견민하게 쌓아둔 말들이, 뱀처럼 바닥을 기며 읍소하는 우리에게 떨어진다.
위에서 아래로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오늘 꼭 그쯤. 먼 미래의 일기들. 비 오면 구정물이 아래서 위로 흐른 걸 멍하게. 바다가 넘치면 다시 멍하게. 바닥을 기는 우리에게 멍하게.
위에서 아래로
금 너도 내 몰락에 웃어주겠니. 내가 스스로를 가둔 방 안 자고 있는 금 금께
백승용 시인 / 연재(連載)
태엽을 감으면 초침 소리 나는 장미가 있다
처음 태엽을 감은 건 오래전 일이다 지우개로 장미를 문지르다 쏟아진 태엽을 본다 미간으로 갇힌 시간이 흐르는데 두 손으로 받을 수 없다
네 옆에 앉고 싶어 눈을 감았다 한참 돌멩이를 괴롭히다 나무 끝에 밤을 달았지 알람이 울려도 깨지 않길 바라며
시간을 계산하던 손가락은 굳었고 나는, 네가 다른 사진을 찍었다는 소식을 부친다
마치 그래서 여전히 그렇듯 아무 말도 못 하고 향기 마른 태엽만 만지작거리며
널 닮은 아이를 만난다 또다시 실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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