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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미정 시인 / 시멘트 길 위에 꾹, 눌러진 발자국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4.

강미정 시인 / 시멘트 길 위에 꾹, 눌러진 발자국

 

 

어떤 급한 마음이 뛰어 갔나봐

이 곳에서 단 번에 뛰어 건너지 못하고

기우뚱 기울은 몸을 한 번

추스리며 갔나봐

시멘트 길 위에 꾹,

눌러진 발자국

어디로도 가지않는 이 발자국 위에

내 발을 살짝 겹쳐 얹어보면

꾹, 눌러진 발자국만 길을 떠나고

끊임없이 길을 떠나고

기우뚱, 날 저무는 오늘도

아직 길을 떠나고 있는 발자국

길 떠나지 못하는 내 발을 얹고

계속계속 길을 떠나는 발자국

그 길 긑에 있는 당신,

무거운 몸을 추스리며

급하게 내 마음 딛고 뛰어 갔나봐

꾹, 눌려져 매일 나에게로 당도하는,

 

 


 

 

강미정 시인 /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애 밴 여자가

한 손으로 불룩한 배를 안고 또 한 손으론 허리를 받치고 지하철 객차에 올랐다

책을 보는 사람, 이어폰을 끼고 눈감은 사람, 핸드폰 액정 화면을 응시하는 사람, 애인과 마주 보며 이야기에 골똘한 사람,

아무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자리를 양보한 나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뒤뚱뒤뚱 내가 앉았던 자리로 와서 앉는 여자의 배를 보며

마음속으로 배를 한 번 둥그렇게 쓰다듬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첫 애를 가진 둥그런 내 배를 쓰다듬으며 눈물이 맺히던 아버지,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비좁은 사람들 틈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애 밴 여자 쪽으로 왔다

지하철 안은 갑자기 조용해져, 책이 사라지고, 이어폰이 사라지고, 핸드폰 액정 화면이 사라지고, 와글와글 입들이 사라지고, 새까만 눈만

꼴깍 침을 삼키며 아버지의 목소리에 꽂혔다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애 밴 여자 앞에서

쭈글쭈글한 손을 내민 할아버지 참 애절한 눈빛과

놀란 눈으로 몸을 움츠린 애 밴 여자의 난감한 눈빛

이 영감탱이가 노망들었소? 할아버지 손을 끌어당기는 할머니

참 미안혀요, 나가 젊었을 때 뱃속에 든 애를 놓쳤는디, 애 밴 사람만 보면 이러요,

내 배에 남아 있는 떨리던 손바닥 무늬 같은 게 가슴으로 올라온다

오래도록 내 눈을 맞추며 웃던 아버지를 할머니가 손잡고 간다

 

 


 

 

강미정 시인 / 그늘

 

 

  벤치에 살짝 엉덩이만 걸친 노인이 촘촘한 나무그늘 사이로 든 햇살의 반짝임 보고 있다

 

  목장갑을 벗지 않은 노인 바지 밑단을 둘둘 걷어 올린 노인 종아리에 힘줄이 구불구불 돋은 노인 주름진 목에 수건을 두른 노인 팥죽땀이 흐르는 노인 목장갑 낀 손등으로 얼굴을 닦는 노인 땀 젖은 옷이 야윈 등에 찰싹 달라붙은 노인

 

  바람이 더위에 달라붙은 나뭇잎을 한 장 한 장 떼어 낸다

 

  멀리 그늘 속으로 스민 사람들의 낮은 웃음소리와 마지막 힘을 다하여 짝을 찾는 매미 울음소리와

  등을 오그리고 간신히 앉은 노인의 가쁜 숨소리와

  비스듬히 지나는 햇살의 반짝임과 하늘을 올려다보는 외국인 노동자의 슬픈 눈빛과

 

  잠시 숨을 돌릴 만큼의 시간 동안, 자신을 녹인 고요한 일렁임과 마주앉은 노인의 땀 젖은 그늘과 벗지 않은 목장갑

 

  그 간극 사이로 팔랑이는 나뭇잎이 그늘을 오므렸다 폈다한다

 

 


 

강미정 시인

경남 김해에 출생. 1994년 《시문학》에 〈어머님의 품〉외 4편으로 우수작품상 등단. 시집으로 『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상처가 스민다는 것 』, 『타오르는 생 』 등이 있음. 현재 <빈터> 동인, (사)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