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성 시인 / 청평사 가는 길
햇살이 낮은 포복으로 수면을 기어간다 지난 봄 떠난 것이 아쉬운 가리산 진달래꽃 무덤이 흘러왔는지 수면 위로 큰 꽃이 피어난다 심술궂은 바람이 꽃볼을 꼬집어보고 간다 소양강댐 수몰지 물밑 사연이 왜 없으련만, 배 위에서 몇 마디 천수경으로 달래며 건너간다
동동주 한 사발을 걸친 발걸음 저 혼자 흥에 겨워 산을 오른다 굽이굽이 낙엽 진 길 사박사박 오르니 어느새 하늘 훤하게 뚫린 그곳, 파란 하늘 등에 지고 앉아 있는 절, 눈 앞 깎아지른 돌계단 오르면 회전문이 바로 하늘문인 듯, 윤회로 새로 태어난 듯 문설주 더듬으며 들어선다
뒤통수가 가을 하늘빛처럼 파란 여승들 마지막 단풍 옆에서 사진 찍는다 사진을 많이 찍을수록 해탈이 되는 것인지, 필름은 얼마나 많은 빛을 담아야 한 장의 사진이 되는 것인지, 생은 또 얼마나 더 많은 명암을 거느려야 완성되는 것인가. 여승들 긴 목이 햇살 아래 시리게 희다
황진성 시인 / 풀들의 스크럼
요즘도 짚신을 신는 수도승이 있는 거 아세요? 성근 짚 사이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라도 살아남도록 길을 열어 주려는 거지요. 사람 발자국은 얼마나 독한지 지나가는 자리마다 모든 것이 사라지네요. 우리 머리를 사정없이 밟고 가는 발자국들 밑에서 삐죽이 잠망경을 밀어 올려봐요. 저 환한 햇살과 차가운 늦가을의 공기를 폐 깊숙이 들이마셔요. 하얀 새끼 왜가리가 뒤뚱거리며 걷고 배암이 흐르듯 몸을 뒤채며, 어린도꼬마리 깔깔대고 산국이 조용히 씨앗을 떨구는 길. 무성하게 우거진 풀들이 스크럼을 짜서 어쩌다 발자국이 찍혀도 금세 묻어 버리는, 길 아닌 길을 바라 보네요.
황진성 시인 / 거꾸로 가는 지게차
어느 시골에 지게와 등짐이 살았대요 지게는 고된 등짐 같은 아들을 키웠는데 아, 글쎄 아들은 네 바퀴 달린 쇳덩이 귀신에 홀려 도시로 야반도주했대요 지게는 식음 전폐하고 시골집 돌담 곁에 서서 동구 밖만 바라보다 솟대로 변하고 친구인 작대기가 ‘아비도 모르는 후레자식’ 하면서 지금도 하늘에 대고 삿대질하고 있다나요 도시로 나온 아들은 네 바퀴 쇳덩이 올라타는 데 성공했지만 언제부터인지 등이 근질근질해지면서 산만한 혹이 솟치더래요 어느 날 문득 지게 위에 업어 주던 아버지 너른 등이 눈물 나게 그리워 시골집 향해 길을 떠났지요 강변로를 따라 하염없이 걸어가네요 건들건들, 두런두런, 시계바늘 거꾸로 돌리며 가는 지게차.
황진성 시인 / 나침반
내 머리는 북쪽을 향해 눕는다.
내가 탄 기차는 도라지꽃 만발한 도라산을 향한다. 하얀 바람꽃 향기 속 아버지를 만난다.
썩지 못한 훈장이 흙속에 묻혀 있다.
흑백의 그리움에 채여 나는 번번이 넘어 진다.
찢어진 발톱에서 흐르는 피로 길을 만든다.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에 두 팔을 벌리고 서서
내 머리와 발은 서로 다른 꽃을 그리워한다. 저기, 북쪽하늘로 겨울을 찾아 가는 저어새.
황진성 시인 / 얼음여왕
컴퓨터 안에는 얼음여왕이 산다 검색-Enter error에 걸려 넘어지다 깨진 무릎 Delete하고 다시 site 바꾸고 검색 얼음바다에서 허우적대다 마주친 눈썹 끝 마우스 꼬리 붙잡고 click, click 누군가를 그려보지만 빙산의 일각, 수면 밑 둥둥 떠다니는 중독된 사랑을 꽂으리. 깜빡이는 cursor의 지휘봉 따라 자판 위를 춤추는 분홍 신*
*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분홍 신을 신으면 춤을 멈추지 못해 결국 발목을 자른다는 이야기
황진성 시인 / 내 사내
화려한 실크도 아니고 부드러운 코튼도 아닌 울 칠십 퍼센트 폴리 삼십 퍼센트로 직조된 그의 바지 세탁통 비눗물 속에 담그자 지난밤처럼 뻣뻣하게 일어선다 씨줄 날줄은 어젯밤을 기억하듯 흥분으로 온 몸의 각을 세운다 날렵한 콧잔등의 예각과 신음을 뱉던 둔각의 입술 살살 만지고 달래어 빨랫줄에 내다 건다 헤픈 입단속을 하듯 집게로 꾹꾹 눌러 놓는다 씨줄과 날줄이 만든 네모진 신방으로 바람 드나들고 햇살이 놀러온다 물방울이 하얗게 부서지며 떠나버린 뒤 다리미와 뜨거운 입맞춤으로 해후를 한다 예리하게 각을 품은 바지를 입혀 세상에 출정시킨다 내 사내, 누구라도 함부로 손대면 베이도록
황진성 시인 / 접촉사고
앞 트럭에 돼지들 가득 실려 간다 소풍가는 아이 같이 시끌벅적 떠든다 바깥으로 얼굴 내밀려 서로 밀치며 귀를 세우고 쫑긋거린다 킁킁 세상 냄새를 맡는다 돼지머리에 머우꽃을 달면 머우꽃대 두반장 요리가 되는데 슬며시 입가에 웃음이 떠오르다가, 돼지도 돼지고기는 먹지 않는다던데 모르고 동족을 먹은 돼지 다음부터 굶다가 죽는다던데 잡식성인 사람 닥치는 대로 먹다 소화불량 걸려 병원 가고 경찰서에 잡혀가고, 예쁜 분홍빛 귓바퀴 나도 모르게 쳐다보다가 돼지들의 수다를 엿듣다가 꽝! 운전 경력 이십년 붉은 줄을 그었다
황진성 시인 / 나 죽은 후, 세렝게티
마라 강 거센 물살을 백오십만 마리 누우 떼가 건넌다 피난민처럼 앞 다투어 건너와 보니 새끼가 없다 되돌려 강을 건너간다 언덕에서 강으로 뛰어내리다 발이 다쳐 누워 있는 새끼 저 무리를 놓치면 안돼, 빨리 가자 아가야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새끼 누우 빨리 내 뒤를 따라오렴 악어를 조심해라 반대편 기슭에서 악어가 입을 벌리고 있단다 난 악어를 향해 헤엄쳐 간다 내가 악어에게 발목을 내어주고 있는 동안 새끼는 천천히 강을 건너간다 물어뜯고 쳐내는 필살의 사투 살아야 한다 저만치 다 건너가는 새끼를 보며 우-욱 내 목젖을 찢는 단말마의 괴성 순간 악어가 입을 벌린다. 절뚝거리며 강기슭으로 도망쳐 나온다 이미 한쪽 다리가 잘려 댕강거린다 하얀 뼈가 삐죽이 나와 있다. 부들부들 떨리는 한발을 내딛는다 채 몇 발자국을 옮기지 못해 쓰러진다 천천히 눈을 감는 나, 어미 누우 둥근 눈 속에 잠기는 세렝게티 초원 파아란 하늘 새끼 구름떼
황진성 시인 / 폼페이 여자
화려한 대리석 천장 사방에 그려진 춘화 여자의 집 돌침대 누워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이천년 전 그녀는 1000℃ 욕정으로 불타는 사내 칼자국 채 아물지 못한 등에서 떨어지는 땀방울 젖가슴의 골을 타고 흐느끼는 물길로 만났을까 검투장에서 다섯 번 승리하면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다 바다의 가슴팍에 수만 번 칼을 꽂은 사내 검투사의 성난 무기도 몸속 깊이 가두어 두고 사내처럼 당당하게 세금을 내리라 언젠가 검은 노예가 모는 마차 타고 로마 귀족 등껍질을 밟고 달려 마르세유까지 ‘나는 2아스로 당신의 것 배려가 있는 메난델은 2아스 여자노예 로가스는 8아스’* 돌침대 닳도록 밤낮 없이 일하다 메난델과 로가스 연리지로 뒤엉킨 날 한 순간 베수비오 화석 안에 새겨진 황홀한 표정의 그녀는 누구인가
* 폼페이 유곽에 쓰여 있던 낙서로 1아스는 화폐 단위로 우리나라 천 원 정도, 당시 빵 한 개의 가격이 2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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