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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혜정 시인 /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4.

조혜정 시인 /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처음 찍은 발자국이 길이 되는 때

말의 반죽은 말랑말랑 할 것이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쏙독새는 온몸으로 쏙독새일 것이다

 

아랫도리를 겨우 가린 여자와 남자가 신석기의 한 화덕에 처음 올려놓았던 말. 발가벗은 말. 얼굴을 가린 말. 빵처럼 향기롭게 부풀어 오른 말. 넘치고 끓어오르는 말. 버캐 앉는 말. 빗살무늬 허공에 암각된 말.

 

처음 만난 노을을 허리띠처럼 차고 만 년 전 바람이 만 년 전 숲에서 불어온다 뒤돌아보는 여자의 열린 치맛단 아래 한번도 씻지 않은 말의 비린내 훅 끼쳐온다 여자가 후후 부풀린 불씨가 쏙독새 울음소리에 옮겨 붙는다 화덕 앞에 쪼그린 아이들 뜨겁게 반죽한새소리를 공깃돌처럼 굴리며 논다 진흙 같은 노을 속에 층층 켜켜 찍히는 손가락 자국들,

 

귀먹은 아이는 자꾸 흩어지는 소리를 뭉치고 굴린다

깊고 먼 어둠을 길어 올려 둥글게 반죽한다

천 개의 나뭇잎들이 천 개의 귀를 붙잡고

흔드는 소리, 목구멍 속에서 쏙독새 울음소리가

허공을 물고 터져나온다

 

바람이 석류나무 아래서 거친 숨결을 고르자

처음부터 거기 살고 있는, 아직도 증발하지 않은

침묵의 긁힌 알몸이 보인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쏙독새는 온몸으로 쏙독새인

그 길이 보인다

 

 


 

 

조혜정 시인 / 외계손증후군*

 

 

오렌지 주스를 사려는데 왼손이 생리대를 훔쳐 핸드백에 넣네 삐이-삐 경고음이 울리는 바코드 판독기 앞에서 정말이지 내가 그런 게 아니란 말이에요 왼손은 어느새 핸드백 속 오버나잇-위스퍼를 꺼내 포장을 찢네 이 팔은 에이리언이야 앞가슴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하네 오른손이 멈출 수 없는 왼손이 길거리에서, 스물네 알의 알약을 한 컵의 꿈과 함께 삼키세요 내용을 읽을 수 없는 알약들을 입 안 가득 쏟아 붓네 전화를 기다리는 오른손과 전화를 받지 않는 왼손이 휠체어를 타고 네 목을 조를 거야 한 손이 죽으면 다른 한 손이 검은 모자를 쓰고 장례식에 와 줄지도, 가지마다 다른 꽃을 뱉어내는 꽃나무 한 그루

 

* 뇌의 이상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왼손과 오른손이 다르게 행동하는 것, 한 손은 다른 손을 통제할 수 없다고 한다.

 

 


 

조혜정 시인

1963년 충남 당진에서 출생. 목원대 국어교육학과 졸업. 2007년 《시와 반시》 하반기 신인상과 2008년 《영남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