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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구광렬 시인 / 가라이 네이어라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4.

구광렬 시인 / 가라이 네이어라

-이령시인에게

 

 

1

태풍에 배 가라앉고 눈 떠보니 자욱한 해무가 구름처럼 보이고 내 몸, 하늘을 나는 듯하다. 사람들, 아니, 죽은 자들이 보인다. 줄 지어 서있는 걸 보니 지옥문에 달했구나.

 

아니다. 기다리고 있다는 듯 반기질 않느냐. 보름달 얼굴에 초승달 눈매, 웃는 입모양마저 반달이다. 말로만 듣던 바실라 사람들, 마침내 나에게 손을 내미는구나.

 

2

골목마다 들려오는 소리, 사르르 똑똑. 수 만 마리 벌레가 뽕잎 뜯는 소리.

아리따워라, 아리따워라. 그들만의 언어로 주술 하는 게야. 사…르…르, 수컷이 암컷에게 거는 주문呪文, 해쉬쉬 빠는 소리보다 더 은밀하다. 내 입 속 혀뿌린 정사를 위한 기물이요, 풀어지는 낱말들은 하나하나 창, 칼이건만, 저 벌레들 입 속에서 풀어지는 낱말들, 하나하나 화평이요, 사랑이구나.

말처럼 새로운 비단(新羅)이다. 어떤 여인의 살결이 저리도 부드러울까. 장안의 것보다 몇 배 더 좋다. 새끼염소 반 마리 값 유리구슬로, 그 몇 필과 바꿀 수 있다니…….

 

3

비싼 꽃이 있으니, 한 포기 값, 중농 서너 집 세금이란다.

온 고을이 꽃에 취해있다. 장려하면서도 소담스러워, 기품까지 있다.

여인네들, 꽃 한 송이를 사기 위해 수백, 수천 전을 낸다. 다투어 머리에 꽂곤 꽃쌈(鬪花)을 하건만, 내 눈에 들어오는 건 꽃이 아니라, 꽃이 매달려있는 여인네들 가슴과 비단이다.

 

혀로부터의 자유, 혀로부터 나오는구나. 왁자지껄, 저자 또한 시끄럽지만 못 알아들으니 오히려 해방이다.

술 인심도 좋다. 머뭇거리지 말아야하며 앞사람, 마시지 않으면 뒷사람, 마실 수 없다.

 

바닥 뾰족한 인형(酒胡子)

내 앞에서 쓰러지네

바닥까지 들이키고

잔을 정수리에 털지 않으면

인형, 일어나지 않네

 

인형,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들, 일어나지 않네

마시고 마셨건만

인형, 내 앞에서만

쓰러지네

 

4

여기서도 차별은 선천이다. 사는 집, 입는 옷이 출신에 따라 다르다. 큰 집, 좋은 옷의 사람들, 일 않고도 번질거리고 작은 집, 나쁜 옷의 사람들, 죽어라 일해도 밥 한 술 뜨기가 힘들다. 좋은 옷에 꾸미기 좋아하는 여자애들, 온통 염정에만 끌리고 나쁜 옷에 작은 집 애들, 온 종일 베틀 아래 박혀있다.

 

이제 그 차별, 나에게도 생긴다. 얄궂어라, 얄궂어. 물 한 모금에 하늘 쳐다보는 병아리들처럼 온 고을, 내 얼굴 쳐다보고 하늘 쳐다본다. 얼굴 둘 곳 만장이라 여겼건만, 뾰족한 코끝마저 숨길 데가 없다.

낮보다는 밤이 좋다. 얼굴 둘 곳, 지천이라 더 좋다. 죽어라 일해도 빵 조각 하나 씹기 힘들었건만, 은수저에, 비단 옷에, 여자까지 생겼다. 그래 내 여자, 삼나무 몸매, 비단 살결의 나만의 여자.

 

흐르는 물 위에 잔을 띄운다

병신처럼 팔 구부리고 마시고

단 번에 석 잔을 마시고

미친놈처럼 웃고, 몽유병자처럼

춤춘다

 

밤새 노닐다 돌아와 보니

다리 넷, 달빛아래 출렁인다

아, 빼앗겼구나

돌멩이로 쳐 죽여라!, 용서해라!

몸속, 몸 밖 신들의 아우성.

 

내 가슴에 있다 한 들,

그대 가슴에

나, 있지 않으면

 

저 가랑이, 내 것 아닌 것을

 

아! 새라면

이 날개, 더 이상 자유가 아니네

사랑 그리워

거기 날고픈 구속이네

 

아니네,

어둠이 부리까지 차오르고

밤은 익을 대로 익어

후두둑, 석비레에 떨어질 때

왜 날아야 하나,

이유 없을 자유이네

 

땅을 보고자 하나

하늘로 가네

왼쪽, 오른쪽 눈망울에

한 번은 자유,

한 번은 구속이네

 

오늘,

새는 사팔눈 휘날리며

실연한 깃털을 여미질 못하네

 

5

재스민, 작약, 모란도 아닌, 들꽃 한 송이 같은 이가 논두렁, 밭두렁도 아닌 궁궐에 나타나서 하는 말.

“여우는 미녀로 둔갑하고 살쾡이는 선비로 가장하네. 뉘 알리, 짐승들이 사람의 몸으로 변신해 홀리는 줄을. 변신은 쉬운 일이요, 양심 지키는 건 어려운 일이네. 참, 거짓을 알고 싶으면 마음의 거울을 닦아보세.”1)

낯설고도 낯설어 ‘얼굴(容) 둘 곳(處)’ 없다하니, 탈 하나를 건넨다. 날 위한 것이냐 물으니,“자넨 이미 탈을 쓰고 있잖아. 고을사람들을 위한 것이네.”

 

불꽃(火神)이야기에 그가 나에게 묻는다. 불도 물을 마시는가. 불은 뿌리가 없다고 하니, 뿌리 없는 꽃이 어디 있냐고 한다. 물, 불은 가려지며 하나 아닌 둘이라고 하니, 불 있는 곳에 물 없으며, 물 있는 곳에 불 없으니, 물불만큼 하나인 것도 없다 한다. 이 모두, 하나를 여럿으로 보는 우매한 눈 때문이며 예수, 마호메트, 자라투스트라도 셋 아닌 하나이며 공자, 석가, 신선도 셋 아닌 하나라 한다.

 

그 떠나던 날, 구름 반 장, 겨울비 되어 내리고 남은 반 장, 떠돌다가 해인海印으로 향한다.

 

도롱이 없인 맞지 못할

슬픔일레라

비가 아님을

고하는 것이니……

보아라,

어떤 계절의 빗방울이

저리도 아리더냐

다신, 돌려보내지 말자

본디

하늘의 것이 아니라

하나, 둘

뜨겁게 오르다

무게를 견디지 못해 떨어지는

땅의 눈물일지니……

 

떠나올 때도 비 내렸다. 빗물 반, 눈물 반이었던 얼굴, 그 얼굴 숨길 곳 없어 다시 떠난다.

그대, 유두 애무하는 법, 앵두 알로 가르쳤지. 이빨로 깨물지 말고 혀끝으로 굴리라했지.

사랑의 기술, 다시 배워야겠네. 앵두 알들을 자근자근 씹어야겠네. 그렇게 파미르를 넘어야겠네.

 

난, 색종이의 색을 보지 않고

바랜 종이를 보련다

난, 종이를 보지 않고

종이일 수밖에 없었던

나무들을 보련다

난, 나무들을 보지 않고

나무이기를 바라던 바람,

구름들의 눈빛을 보련다

 

6

배에다 몸을 싣는다. 이별의 아픔만큼 사랑이 깊었구나. 망각을 위해선 세월 따라 흘러야지. 저 바다 또한 그렇지 않느냐.

 

기억을 지우면 인연이 없어지는지

바다는 기억을 지우려 한다

무엇을 못 잊어 갯바위에 머리를 치며

아니, 아니라고 도리질하는가

뉘 헤아릴까, 저 아픔.

바람 없인 항해할 수 없으니

바다의 수심愁心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파도가 되어

화석 된 기억들을 지우려듦을

 

어떤 가객이 숨겨진 침묵을 노래할 수 있겠나. 어떤 여인이 뱃속과 상반된 운명을 출산할 수 있겠나.

파도 속에서도 그녀의 불안정한 맥박을 가늠할 수가 있다. 가랑이 속 얼굴엔 그 어떤 시장에서도 구할 수 없을 천박한 웃음이 흘렀을지도 몰라.

 

난, 잊는 기술을 배우고자 하네. 미워하는 기술. 기술을 넘어 예술, 예술을 넘어 신앙.

내 증조할아버지의 신은 불, 내 할아버지의 신은 야훼, 내 아버지의 신은 알라. 그럼 나의 신은?

한 발짝, 뗄 때마다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열 신을 부르짖곤 무신론자가 돼버리고

 

어쨌든 혼자 있을 때 덜 외롭다. 얼굴 둘 곳이 만장인 까닭이다.

 

7

종교란 삶에 애정 있는 자에게 깃드는 허영虛影 아닌가. 심판도 그렇고. 삶에 대한 의욕도 없는데 뭔 영생…….

아니다. 찾는 게 있다면 잃을 게 있다. 난, 지금 물을 찾는다. 새까맣게 타버린 하늘 아래, 그 뉘도 마지막 미소를 흰 천에 담을 수가 없다. 죽은 말의 축축한 간이라도 꺼내 먹어야지…… 아니, 물보다 더 간절한 게 있다.

 

가만, 손을 넣는다

수컷의 젖은, 있기에 더 서럽다

멀고먼 자웅동체시절

 

몸도 마음도 하나였을 태고고적 시절

내 마음 그대 알고

그대 마음 나 알았던 시절엔

외로움, 괴로움도

반반씩 느꼈을 건만

오늘,

온전한 외로움, 괴로움,

시리게 골수를 저민다

어느 낯선 별 중력아래

해골의 길 위에 누워

수만 마리의 낙타 발자국에

이제 이별을 고하련다

 

아, 모래바람, 달빛바람 안녕!

 

8

밥그릇을 닦는다.

이 사막에 밥이 어디 있겠나. 밥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몰골을 보기 위해서다.

 

니목숨이예수목숨이라도된다말가골고다의언덕이라도마련해주련지금벗어던질수있는건고린내나는발싸게뿐이지않은가무너진다리만큼머리굵어진원숭이의지혜와슬픔을혼자서아는척하는놈아뒈지거라! 하다가

 

놈, 나보다 늙어 보인다

놈, 나보다 비겁해 보인다

놈, 나보다 약해 보인다

이래저래, 동정심을 자아내는 놈,

빈 그릇 속에서 웃고 있다.

 

9

난, 어떤 것들의 주인임을 소리칠 수 있나? 모래바람에 문드러져나가는 살점의? 뽑혀져나가는 머리카락의? 흘러내리다, 말라버린 피딱지의? 뭣이 떨어져나가야 내가 되는가.

필요는 사랑보다 굳셈에 틀림없다. 사랑해서 떠난다고는 하지만 필요해서 떠난다곤 하지 않는다. 그대, 날 사랑하지 않았다. 날 필요로 했다.

 

골육은 독수리와 사막날쥐의 밥이 되고

 

영혼은 저승의 문을 두드린 뒤

미드라의 저울 위로 떨어지겠지

넓고 편안한 다리를 건너 천국으로 향할 것인가

칼날 같은 다리를 건너 지옥으로 떨어질 것인가

사랑은 선善이건만

주인 있는 여편네를 사랑함은 악惡 아닌가?

막,

저울이 악 쪽으로 기우는 듯하네

 

그래, 그렇다면 그녀가 필요로 했던 난 누구며, 뭣인가?

 

10

해가 머리 위로 솟는다. 밥그릇을 돌려가며 마지막 수염을 깎는다. 더부룩하니 산양의 머리통 같구나.

 

발가벗고 맞아야지, 머리서 발끝까지

수직으로 꽂히는 네 하얀 몸을

까맣도록 받아야지

너 없는 밤, 종보다 무거운 머리통을

온기 남아 있는 모래에 박고

하, 마른 울음을 가없이 울었더냐

 

눈물,

이별보다 더 아픈 사랑을 감내 못할 때 늑골 깊숙이 파고든 빗방울들, 지하실 포도주인 양 저장되었네

 

눈물,

살아있음을 고해하는 심장의 전령사.

길지도 않은 두레박줄로 우물물 긷듯 퍼 올림도 억수 비 내리던 시절 우산 없이 거닐었음이랴

 

눈물,

한계를 느끼는 신들의 성수. 사막에서의 유일한 물. 뉘 울었노라 믿겠나. 쉬 마르니 또 고마워라

 

눈물,

바닥 드러낼 때 졸음에 겨워하는 사막고양이인 양, 이제 바람 멎을 저 풍경을 과거라 부르리라

 

계간 『사와 사란』 2021년 여름호 발표

 


 

구광렬 시인

멕시코국립대학에서 중남미문학을 공부(문학박사)한 뒤, 멕시코 문예지 '마침표(El Punto)' 및 '마른 잉크(La Tinta Seca)'에 시를, 멕시코국립대학교 출판부에서 시집 '텅 빈 거울(El espejo vacío)'을 출판하고부터 중남미작가가 되었음. 국내에서는 오월문학상 수상과 함께 현대문학에 시 '들꽃'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 시작. 현재 울산대학교 인문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경주 동리목월문예창작대, 대구교대 등지에서 문예창작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