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령 시인 / 박달재 신화
Ⅰ.
모두가 알 것 같았지만 모두 모르는 척 했다
똬리 튼 살모사 눈알이 사금파리마냥 반들거리던 봄이었다 경운기 엔진 음 같은 이장의 목소리가 부고를 알렸다 회관 확성기 소리를 베낀 부추밭 꽃이랑이 일순 내밀한 비밀처럼 술렁거렸다
과부였던 감실 할매가 대를 이어 청상이 된 며느리, 반성 댁을 지목할리 없었다
”내사 암 것도 모린데이~, 갸가 이거를 목마르면 마시라꼬.....“
치명(致命)은 몽롱했다 깨진 막걸리 사발만이 예리한 정황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침묵이 어리석은 자들의 미덕임을. 누가 실존에 앞선 본질을 강요할 수 있나
남편의 무덤에 풀 약을 치고 왔다는 알리바이는 허술해서 더 자명했다 그 밤, 해거름 아지랑이도 감실 할매의 혼인 냥 귀촉도 소리 따라 박달재를 울고 넘었다
반성 댁의 곡소리만큼 밤은 깊고 마을은 흉흉했다 모두가 알 것 같았지만 모두가 모르는 척 했다
Ⅱ.
밤마다 시아비는 군에 간 서방대신 속곳 봉두에 불 지피고 낮이면 가로 톳 숭숭한 젊은 시아재가 영주 댁의 문지방을 들락거렸다
철없는 시누이가 근거 있는 소문을 퍼트리는 동안 마을은 술렁거렸다 까마귀 까악까악 소리에 놀란 봇도랑 고마리가 오종종 줄지어 피던 봄 영주 댁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고 다음해 가을엔 꽃순 같은 딸을 낳아 삼대가 멍석말이를 당하고 동구 밖으로 쫓겨났다 시아비는 시아비, 시아재는 여전히 시아재, 삼촌이 오빠가 되었지만 영주 댁은 평온했다 서방의 전사(戰死) 통지서가 날아들던 날, 마을은 잠시 아주잠시 술렁거렸을 뿐 울바자 너머 소란을 잠재우듯 박꽃이 줄지어 피어나고 동구 밖 까치소리에 처마의 고드름이 녹아 죽담 돌 허벅에 또롱또롱 맺히는 봄, 마을도 곧 평온을 되찾았다
돌을 던질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돌 대신 거울을 내 얼굴에 비춰본다 돌을 던져 거울을 깬다면 그것이 필경 마뜩한 윤리가 될 것이다
Ⅲ.
돌탑 보 얼음장이 쩍쩍 갈라지고 성황당 오방색 깃발도 웅웅 바람소리를 베꼈다 범 부엉이 당수나무 우듬지에 들명날명 암흑의 밤을 쪼아대면 마을의 전설이 소리로 부활했다
당골의 점사는 잔인했다 난 자리에서 내리 여섯, 죽어나간 자식의 명을 이으려 초유도 먹이지 못한 아이의 목을 새끼줄에 묶고 박달재를 울고 넘었다는 감실 댁의 곡성일거라고들 했다
만물에 응해도 자취가 없는 사람마을에 만물의 감응이 가혹한 모정을 타전하는 밤 이었다
격월간 『현대시학』 2021년 5~6월호 발표
이령 시인 / 사사로운 별
꿈에서 깨자 나의 공의는 가까스로 정의로웠다 테이블 아래 아베크족의 엉킨 다리를 이해하고 애인의 휴대폰 비밀번호를 존중하기까지 반백이 지났다. 마냥 선한 것이 미덕임을 주입하던 부모의 혈통을 거부하자 통장의 잔고가 늘었다. 대체로 진영의 문제는 정의와 따로 놀았다. 빨강과 파랑이 섞이면 보라색으로 고상해졌지만 내 눈엔 멍 같았다. 사람들은 색을 잃어가면서 익어가는 거라고 우겼다.
칸트의 도덕과 벤담의 공리 사이에서 머리로 시소를 타던 시절이 있었지만 허기는 여전했다. 바로크풍의 마차에 탄 공주를 조소하며 샤넬의 로고를 수집했고 여성을 강조하자 천공의 성이 무너졌다. 운명은 신의 영역이고 인간을 거부하자 신은 빛의 속도로 컴퓨터자판에서 부활했다. 불면증으로 밤보다 깊은 새벽을 밝힐 때마다 정의는 어둠과 한통속이라 쓴다.
옆집 채식주의자의 개가 거세를 당하자 온순해진 건 아파트였고 사람들은 평화를 가장했다. 놀랍게도 불면증은 옆집 개가 죽고 나서 완치됐다. 아파트 소장의 잦은 훈화가 사라지자 으르릉 거리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채도로 착해지고 목줄로 길들이며 개를 사랑한다고 우기던 옆집 채식주의자는 점차 사나워졌다. 피를 뚝뚝 흘리는 풀을 뜯고 있는 개의 싱싱한 혓바닥이 쓰윽 이마를 핥고 나서야 난 꿈에서 깼다.
정의를 부정하자 정의가 생겨났다. 꿈속의 꿈처럼 모호한 생은 어디까지 견뎌야하는 불면증인가. 시뮬레이션 같은 지구의 무게를 견뎌야하는 당신들과 난 또 어느 지점의 불면증인가. 저울과 칼을 들고 서 있는 꿈, 생이 영원하다면 잔인하다는 선인의 치명이 별빛으로 뜬다. 서슴지 않는 밤의 질문들이 빼곡하게 빛나는 밤, 아스트리아의 가려진 눈을 오래 보는 나는 정의를 섣불리 정의하지 않는 사사로운 별이 되겠다.
격월간 『현대시학』 2021년 5~6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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