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의수 시인 / 갈대의 생각
어디서인지 집을 옮기는 소리 금빛햇살 속에 그의 키는 어느새 저렇게 커져 있다 가을은 씨앗처럼 부풀어올라 단단하다
이곳 마을은 가을에 빠졌다 차들은 벌써 남쪽으로 달린다 바람과 함께 그림자를 끌고 따뜻한 햇살 은 마지막 열매처럼 떨어져 뒹군다
하늘 깊이 솟아오른 목, 발을 젖게 하는 건 생각일 뿐이라고, 하지만 뒤집어도 뒤집어도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이 아침 마을은 차표를 구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 시집 '달이 뜨면 나무는 오르가슴이다' 에서
변의수 시인 / 양파 속의 우주 15
여기저기 울리는 개구리 움직임 소리에 물방울이 놀란다. 흐트러진 공기가 귀청을 소란스럽게 한다. 사각형의 우주는 두 개의 산보를 생각한다.
아직도 잠에서 깨지 않은 전화기에선 시냇물이 재잘거리며 흘러나온다. 까만 수화기가 그의 눈을 푸르게 물들인다.
언제 여기까지 왔을까. 노란 벽의 교회가 푸른 옷을 갈아입는다. 녹색 구렁이가 빨간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둥근 창문을 감는다. 목을 구부려 시계를 바라본다. 푸른 가슴에 귀를 대어본다.
카멜레온처럼 생각이 창문을 푸르게 물들인다. 눈꺼풀 위에 날리는 눈보라가 순식간에 그의 어깨를 겨울로 몰아넣는다.
묘지의 검은 나무들 사이로 꿈인 듯 딱, 딱, 딱 소리가 울려 퍼진다. 비어 있는 공기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놀란 잎사귀들이 바람에 두리번거릴 뿐 아무도 없다.
한 편엔 축복을 비는 은샘교회 사람들의 예배소리, 다른 한 편엔 마을을 내려다보는 깊은 잠 속의 기운들.
하늘색 전화박스가 태양 아래 녹아내린다. 노란 뱀처럼 꼬불꼬불한 길 위에 누에 같은 버스가 기어간다.
카레처럼 녹아내리는 사과조각들, 혀를 쏘는 노란 향신료, 비타민처럼 새콤한 잠, 등받이 의자는 구름 뒤편의 여름을 기다린다.
익어 가던 먼 밭의 붉은 과일들, 바람에 손을 흔들던 깻잎, 푸른 잠을 밀어 넣던 방아깨비, 태양은 언제나 졸립다.
줄지어 날아오르는 청둥오리 떼의 둥근 부리들, 미처 잠 깨지 못한 녹색의 발바닥이 깃털을 부빈다. 막 치켜 뜬 눈에 비친 날개들의 군무가 멀어진다.
한 무리는 태양의 붉은 동굴 속으로, 한 무리는 푸른 달의 그늘 속으로.
—《현대시》2012년 8월호
변의수 시인 / 양파 속의 우주 59
파스텔 톤의 노을이 물드는 저녁이다. 이번 작업물은 냉각탑이지만 관측소는 아니다. 예전의 냉각탑은 관측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냉각탑은 버려진 쇠붙이가 하나의 전시물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나의 냉각탑은 기호의 제작이 아닌 영혼에 관한 작업이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기호는 영혼의 흔적이다. 하지만 형상의 기호 없이도 영혼은 존재한다. 기호는 인식의 산물이다. 그와 달리 영혼은 인식되지 않는다. 영혼은 스스로 사고하고, 사물들이 사고하게 한다. 영혼은 물리적 성교로써 자신을 복제하지 않는다. 영혼은 생리학적 교배로써 증식하지 않는다. 영혼은 사물들의 사고를 통해 복제되고 증식한다. 냉각탑은 사물들에게 제시됨으로써 이미 사물들의 영혼에 자신을 복제하고 증식시킨다.
시인의 텍스트는 냉각탑이 필요한 공장이나 원자력 발전소일 수도 있다. 그곳은 냉각탑이 필요하다. 언어의 냉각탑과 철구조물의 냉각탑은 기호 매체의 차이일 뿐, 영혼을 창조하는 일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냉각탑의 설계는 정밀한 안정성이 요구된다. 관측소는 간결한 엄격함이 요구되지만 이번 기획에선 무엇보다 통일성과 자동성이 중시되었다.
이번 냉각탑은 사물들의 사고를 돕는 관측소가 아니다. 첫 번째 냉각탑은 사물들의 사고를 돕는 관측소였다. 하지만 두 번째 냉각탑은 첫 번째 관측소를 창고에 밀어 넣고, 영혼이 탄생하는 과정의 작업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어떤 사물들이든 하나의 기획 아래 직조되어 냉각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물론, 냉각탑이 어디에 설치되고 무엇에 기여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에 관한 설명은 운용자들의 상징 작업에 달려 있다. 그것은 영혼들의 움직임이 드러내는 일이다. 덧붙일 건, 상세한 설명 자료는 냉각탑 안에 녹여 넣었다. 재창조나 모방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영혼은 언제나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독창적인 존재이다.
변의수 시인 / 양파 속의 우주 ⅩⅩⅩ -그림자놀이
나무를 굽힌다면 나무의 형상을 지우는 게 아닌가. 바위가 그림자를 짓누르거나 그림자가 나무로 되살아난다면.
몇 개의 흉기가 입수된 증거물로 탁자 위에 놓여 있다. 새벽이 오기까지는 관찰할 필요가 있다.
형상은 처음부터 조작되었는지 모른다. 변장된 형상 뒤의 실재를 움직이는 손. 어떤 그림자도 눈처럼 표백될 수 있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가장될 수 있다.
가끔 뜨거운 불빛이 숲을 엿볼 것이고 조작하는 손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백색의 빛과 붉은 빛이 어떻게 하나의 형상에서 드러날 수 있는지. 아니면 구조적 인식의 문제일지!
화면에선 모든 위험이 근본에서 제거되었다고 공표하지만, 그것은 와인과 함께 감춰진 약속일 뿐, 언제나 거짓임이 뒤늦게 드러난다.
사물을 이동시키는 들판과 어둠 속의 낙뢰 속엔 아직도 해독되지 않는 형상들이 있다.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렁이는 건 언제나 위험한 손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표이다.
크리스마스가 붉고 흰 빛의 신비로 위장될 수 있는 건, 언제나 하나의 코믹한 오브제 때문이다.
자작나무 숲이 무릎까지 베어 넘어져 있다. 아직 겨울은 끝나지 않았다. 눈밭엔 지금도 보이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의식의 장막 뒤편, 빛과 어둠을 다스리는 그림자들. 달의 뒷면에선 버려진 개들이 낡은 영들의 가면을 둘러썼다 물어뜯곤 한다.
변의수 시인 / 양파 속의 우주 ⅩⅩⅩⅠ -불가사의한 계절
허공에 오이넝쿨이 매달려 있다. 먹구름이 넝쿨 깊숙이 스며든다. 먹구름의 벽화는 난폭하다. 스스로 묶인 넝쿨은 먹구름 속에서 몸을 비튼다. 보이지 않는 힘에 먹구름은 찢어지고 흩어지기도 한 곳으로 몰려들기도 한다. 먹구름은 자신에게 이루어진 것은 그를 바라보는 영혼들에게도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견디기 어려운 영혼은 벽 속으로 숨어든다.
한 폭의 살아 움직이는 벽화를 보는 것은 햇빛 속에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구름들의 형상 때문이다. 시인이 언어의 형장刑場을 드러내 보이는 건, 먹구름이 비쳐주는 벽화를 영혼들이 쉽게 지나치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형상의 무대를 굳이 재현하는 것은 미력한 감각에는 나타나지 않는 움직임들을 예지토록 하기 위함이다.
언제나 먹구름이 태양을 스쳐 지나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늘엔 먹구름이 흐르지 않는다. 빛과 어둠은 종잡을 수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하늘은 언제나 투명하다. 빛은 제 무게를 못 이긴 어둠의 정령들이다. 먹구름은 하늘을 나는 어두운 영혼들이다.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어둠은 하나이다.
가을 햇살을 움켜쥔 넝쿨들은 모든 걸 단념한 듯하다. 마른 잎사귀들이 손가락을 늘어뜨리고 있다. 빛바랜 오이넝쿨이 등불 아래 머리카락을 늘어뜨린다. 구름 한 점 없는 태양 아래서도 폭풍이 일고 먹구름이 뒤엉킨다. 먹구름은 햇빛을 가리고 바람의 힘을 빌려 드러나지 않은 세계의 혼돈을 보여준다.
누구도 치우지 않는 지지대가 비밀스레 자신만의 포즈로 먹구름과 넝쿨을 엮은 채 들판에 세워져 있다. 한겨울은 이대로 지나갈 것이다. 우리가 보지 못했을 뿐, 먹구름은 무수히 다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폭풍이 지나갔지만, 그해 겨울에도 푸른 파와 무는 싱싱하게 자랐다. 물론 다른 식물들도 풍족하게 거두어졌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시인정신 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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